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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Oct

요한계시록 11:12-14-성도의 승천

작성자: blue 조회 수: 6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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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말씀: (요한계시록 11:12-14)
(계 11:12)

『하늘로부터 큰 음성이 있어 이리로 올라오라 함을 저희가 듣고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니저희 원수들도 구경하더라』
(계 11:13)

『그 시에 큰 지진이 나서 성 십분의 일이 무너지고 지진에 죽은 사람이 칠천이라 그 남은 자들이 두려워하여 영광을 하늘의 하나님께 돌리더라』
(계 11:14)

『둘째 화는 지나갔으나 보라 셋째 화가 속히 이르는도다』
복음을 전하다 죽고 만 두 성도를 하나님께서 구름을 보내어 태워서 하늘 나라로 올라오게 하신 것은 성도들 살 영원한 도시가 이 세상이 아님을 말해주는 겁니다.

즉 하나님은 우리 성도를 눈에 보이는 이 세상에서 성공자로 지내게 하시는 분은 아니라 다른 장소에, 다른 세계를 따로 만들어놓고 거기에 도착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구원 방식에 포함된 경로입니다.

우리 인간들의 아이디어가 아닙니다.

두 성도를 하늘 나라로 올려보내놓고서는 나머지 이 세상에 지진이 일어나게 하십니다.

지진이란 이 세상을 세우기 위함이 아니라 흔들어서 무너져 내기기 위한 시도입니다. 이렇게 해서 두 성도는 평생 폐허 위를 산택하듯이 살아온 바가 됩니다.

재개발 지역에 가게 되면 포크레인과 부르도저의 굉음 아래서 우리들의 어릴 적 꿈들이 박살나고 사라져 버림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정성과 집착이 실려있던 이 세상을 사랑합니다.

포기 못하고 있습니다.

사라짐을 아쉬워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방식과 우리의 구원방식과 섞으려는 의도가 여전히 남아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 인간의 구원방식은, 자기의 행함에 가치를 그대로 보존되는 방식으로 시도됩니다.

마치 갓 시집에 새댁이 명절날 한복 곱게 차려입고 부엌에 들어온 셈입니다.

하지만 한복 질끈 동여매고 음식 차린다고 애써봤자 같이 일하시는 큰 동서 형님이나 시어머니는 애초로움에 그냥 방에 들어가라고 독려합니다. 그 새댁은 시집 식구들이 만든 음식을 그저 먹는 입장에 놓여 있습니다. 이 때 새댁은 죄책감보다는 점차 감사한 마음이 듭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구원방식은 인간의 구원방식과 우리 내부에서 부딪치게 되어 있습니다.

마치 물고기가 자진해서 사람들이 있는 배에 살겠다고 기어올라오지 않습니다. 그들 물고기는 나름대로 사는 방식이 따로 있습니다. 하지만 낚시 바늘이 아가리에 꿰어들게 되면 극력한 저항이 그 물고기 내부에서 발생하게 됩니다.

고분고분, 순순히 배로 이끌려오지를 않습니다.

우리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존재 가치를 표시내는 것에서 사는 보람을 갖습니다. 자신을 쭉 쳐진 시체로 보지 않으려합니다. 행세께나 하려고 듭니다. 그러나 죄라는 바로 이런 자아 의식에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방식은 우리가 사랑했던 이 세상을 절단내는 과정으로 진행됩니다.

십자가 가 이것입니다.

이미 우리를 죽은 시체로 보는 것은 십자가 안에서 발견되는 자아상입니다. 이 십자가를 외면하면 이 세상 곳곳에는 우리들은 인간적 구원방식이 남기려고 합니다.

바로 이것을 하나님의 구원방식이 박살내시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를 승천시키신다는 것은 그 어떤 인간적 구원방식이 따라잡지 못하는 방식으로 구원하심을 뜻하고 그리고 그 어떤 인간의 열심도 이 하나님의 구원방식에 개입할 수 없음을 말해주시는 겁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기획되고 개시된 과정은 그 마감까지도 하나님의 일방적 열심을 근거로 하여 완료를 보게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구원된 사람은 자신이 걸어온 뒤를 바라보게 되면, 고비고비 마다 하나님의 십자가 능력이 작용하고 있었음을 압니다.

마치 밤에 등산을 하여 산 정상에 올라와본 사람은 새벽이 되어서야 비로소 지난 밤 동안 등산길 주변에 어떤 꽃이 피었는지 어떤 우람한 바위들이 절경이 펼져졌는지를 아는 것처럼 말입니다.

성도의 부활과 승천은 그 사전에 이미 십자기의 능력으로 이끌림을 받은 성도에게만 주어지는 구원의 경로입니다. 십자가의 능력으로 인도받은 적도 없는 자가 영광스러운 부활과 승천의 혜택을 입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에게 십자가의 능력으로 인도받아 승천에 이르게 되는 것일까요?

창세기 5장 에 보면 에녹이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이 분은 365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 나라로 승천한 분입니다. 그런데 이 분의 한평생은 자신의 우수함을 과시하는 평생이 아니라 예수님을 증거하는 인생이었다는 사실이 히브리서 11장 에 보면 나옵니다.

예수님을 증거한다는 것은 곧 예수님의 십자가 능력을 증거하는 겁니다.

그 이유는 이러합니다.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간주되는 자들은 어떤 자들이냐 하면, 하나님에 의해서 구별된 자들입니다. 구별이란 특별히 선택된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친히 골라냄을 당한 자들이라는 말입니다.

마치 핀셋으로서 콩을 하나씩 다른 한쪽으로 소복히 곱게 모으듯이 말입니다.

그런데 이들 콩은 그냥 옮겨지는 것이 아니라 어린 양의 피로 묻힘을 당하면서 한쪽으로 옮겨지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외부에서 성도의 죄지었음을 문제 삼으려고 해도 성도는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대신 희생하신 주님과 함께 있기에 정죄의 능력이 성도에게 적용될 수 없는 겁니다.

비록 이들이 광야에서 애굽의 생활 방식을 그리워하고 그 안에서 자아 나름대로의 가치를 찾고자 시도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불로서 태우셔서 하나님의 구원의 의도가 결코 인간 개인적인 행복에 있지 않음을 보이셨습니다.

이로서 우리 성도는 오직 하나님이 구원방식에 의해서 구원됩니다.

우리가 나태해도 주님을 부지런하십니다.

한 번도 실패나 쉼이 없습니다.

우리들이 점차 늙고 죽는 것이 어디 우리가 선택한 일입니까?

히브리서 9:24  에 보면,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일이요 그 다음에는 심판이 있으니라” 라고 되어 있습니다. 마치 죽음의 아우스비치 유대인 수용소로 끌려가는 열차 위에서 자신의 장래 사업을 계획하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처럼 우리네 인생도 결국에는 하나님에 의해서 회수 당할 수 밖에 없는 처지로 끌려들어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결정짓을 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성도에게는 다음과 같이 삶이 주어집니다.

골로새서 3장의 말씀처럼, 이미 우리가 이 땅에서 죽은 자가 되었고 하늘 나라에서 이미 우리는 산 자가 되었다는 겁니다. 죽은 자가 만들어낸 자기 구원방식을 우리는 늘 포기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미 우리 안에는 십자가를 증거하기 위한 목적으로 주님이 구원방식이 작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보다 우리를 더 사랑하는 식으로 주어짐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내가 무엇을 지켜서 구원되어 있지 않고, 십자가가 우리 내부에 박혀 있음을 보고 주님께서 그 사랑을 위해 인도하심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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