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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의 형성

조회 수 12010 추천 수 0 2007.10.02 22:37:24
    1. 신명기의 형성
     

    신명기는 오경의 마지막 책으로 창세기부터 열왕기하에 이르는 하나의 긴 이야기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다. 우리성경의 제목 '신명기(申命記)'와 영어성서의 제목 'deuteronomy'는 모두 신명기가 '새로운 명령' 혹은 '두 번째 율법'을 의미한다. 첫 번째 율법은 시내산에서 모세가 하나님께 받은 계약법을 의미한다면, 신명기의 두 번째 법은 모세가 죽기 전에 백성에게 행한 당부의 연설이다.

    이제까지 창세기부터 시작하여 민수기에 이르기까지 기나긴 이야기를 한 셈이다. 이제 신명기는 오경을 마감한다. 오경은 이스라엘에게 율법서(토라)로 불려졌으며, 처음에는 이 오경만이 그들에게 유일한 경전이었다. 오경이 완성된 후 한참 만에야 역사서, 예언서, 그리고 시와 지혜문학들이 출현하였다. 신명기는 오경 이야기의 결론이며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기 바로 직전의 상황을 반영한다.

    이스라엘이 광야생활을 회고하면서 반성의 기회로 삼고, 장래 다가 올 미래를 예측하면서 모세의 유언을 설교로 이해한 것이다. 모세의 설교에는 설교의 대상인 이스라엘을 향한 2인칭 단수(너)와 복수형 호칭 '너희들'이 자주 등장하고 있으며, 때로는 시 형태의 노래(32장)와 축복의 말씀(33장) 등이 출현한다. 그 밖에도 신명기만의 독특한 표현이 발견된다. 이것들이 신명기의 성격을 밝혀준다. 예를 들면 (1)하나님을 두려워하라(4:10; 5:29; 6:2; 8:6 등), (2)규례와 법도를 지키라(4:1; 5:1; 11:32 등), (3)다른 신을 섬기므로 하나님이 진노하신다(7:4; 11:16; 13:2 등), (4)야훼 보시기에 이스라엘이 악을 행한다(4:25; 9:18; 17:2 등), (5)너희는 이집트에서 종살이한 것을 기억하라(5:15; 15:15 등), (6)야훼가 이스라엘을 선택하셨다(4:37; 7:6 등), (7)야훼께서 땅을 기업으로 주셨다(4:21; 15:4; 19:10 등)는 식의 표현이 종종 발견된다.

    신명기는 모세가 요단강을 건너기 바로 직전에 모압평지에서 행한 연설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보다 훨씬 후대인 유다의 요시야 왕 때 정리된 것으로 여겨진다. 최근의 학자들은 요시야가 성전을 수리하다가 발견한 율법서가 신명기의 핵심을 이룬다고 말한다. 신명기 12-26장을 '원신명기'라고 부르는데 이것을 근거로 요시야는 종교개혁을 단행했다는 것이다(621 B.C.E.; 참조. 왕하 22-23장).
     
     

    2. 모세의 첫번째 설교

    첫번째 설교에서(신 1:1-4:43) 모세는 광야를 유랑하는 동안 체험했던 야훼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기억한다. 광야생활을 인도하신 분도 하나님이시요, 이스라엘을 가나안으로 인도하시는 분도 역시 야훼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선조들에게 하신 약속은 이제 눈앞에 다가왔다. 그 약속은 땅이 없어 떠돌이 생활을 하며 이집트의 종살이로 살았던 이스라엘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준다는 것이다. 땅에 대한 약속은 아브라함에게 하신 최초의 언약이었다. 그 언약이 이제 성취되는 순간이다(신 1:8). 그래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그래야 더 큰 축복이 미래의 이스라엘을 기다린다.

    그런데 하나님의 약속은 왜 이다지도 더디게 성취되는 걸까? 40일이면 당도할 가나안 땅에 40년이 지나서 겨우 들어오게 되지 않았는가? 아브라함을 축복하신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고생하는 동안 무얼 하셨단 말인가? 너무도 오랜 기간동안 이스라엘을 돌보지 않은 하나님의 속셈은 무엇인가. 사람들은 요단강 동편에서 가나안을 바라보면서 갖가지 상념에 젖어 있었을 것이다. 모세는 말한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이 그들을 광야로 이끌어 내신 해방자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았으며(1:22-28), 우상의 형상을 조각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자초했기 때문이다(4:25-26). 우리는 모세가 잠시 자리를 비우고 시내산에 올라간 사이에 백성이 무엇을 했는지 잘 알고 있다. 그들은 금송아지를 만들고 가나안의 바알종교에 동조하지 않았는가? 이스라엘의 비신앙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것을 지연시킨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암몬, 모압, 에돔에게도 축복하신다(2-3장).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이 이스라엘에만 국한되지 않음을 보여준다. 인간과 땅의 모든 것들은 야훼의 것이다(참조. 32:8-9; 출 19:5). 이렇게 우주적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개념은 상당히 후대에 나타난다. 주전 8세기 예언자(아모스, 이사야 등)와 포로기 예언자인 제 2 이사야(이사야 40-55장 저자)에게 분명하게 드러나는 하나님의 우주성(universality)은 신명기를 기록한 성서기자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여겨진다. 신명기서의 대부분이 요시야 왕 이전에 완성되었고 나머지 부분들이 그 후에 기록되었다면 이해가 될 것이다.
     

    3. 모세의 두번째 설교
     

    모세의 두번째 설교(4:44-11:32)는 출애굽기에서 언급된 십계명을 담고 있다. 그러나 신명기의 십계명(신 5:1-27)은 출애굽기의 십계명(출 20:1-21)과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그 순서는 일치하고 있지만 세밀한 조항이 다르게 나타나며 때론 강조하는 말이 덧붙여진다. 두 십계명 사이의 차이점은 안식일 준수에 대한 명령에서 두드러진다. 출애굽기는 안식일을 하나님 창조과정의 일부로 강조한 반면, 신명기는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종살이한 것을 전제한다.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느라 지쳤으니 이젠 쉬라는 것이다. 결국 출애굽기의 십계명은 제의적 성격이 강한 반면에, 신명기의 정신은 사회적 성격이 두드러진다. 안식일이 되면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동물도 쉬어야 한다. 이것은 다분히 안식일 제도의 발전적인 측면을 보여주며 신명기 저자의 사회적 관심을 드러낸다(신 5:12-15).

    신명기를 기록한 사람은 모세의 입을 빌려 강한 어조로 명령한다. 그것은 히브리 명령어로 '쉐마' 곧 '들어라'이다. 귀를 열어 하늘의 음성을 들으라는 것이다. 우리가 들어야만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이 이 땅에 실현될 수 있다. '쉐마'(들어라)는 두 가지의 선언적 의미를 내포한다. 그 하나는 야훼만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될 수 있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하나님을 사랑할 때만이 이스라엘이 축복을 받는다는 것이다. 다른 선택은 없다. 이것은 하나님과 이스라엘간의 계약관계를 보여준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요, 야훼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그 관계는 이집트에서 종된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구출한 사건에서 출발한다(5:6).

    이러한 '쉐마'형식은 성서교육의 역사적 유산을 보여준다.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야훼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 자녀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있을 때나 길을 갈 때도 하나님의 말씀을 강론하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 말씀을 손목이나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해야 한다(신 6:4-9). 하나님의 말씀은 늘 우리 삶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 가장 가까운 곳에, 그리고 눈에 가장 잘 띄는 곳에 하나님의 말씀을 붙이고 그대로 행하고 있는지를 점검하라는 뜻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우선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한다.그렇지 않고 자기의 편견이나 배타적인 교리를 앞세우면 안된다.

    신명기 저자는 이스라엘의 자녀교육이 오늘의 시점에서 출발할 것을 가르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역사의식을 전제로 하고 있다. 교육과정을 통하여 야훼의 구원사건을 영구히 기억하도록 권고한다(신 4:9, 31). 과거의 사건을 역사에 묻어 두지 말고 현재적인 의미로 전달해야 한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조상이 이집트에서 종살이를 한 것'이 아니라 늘 '우리가' 종살이를 한 것이다. 과거의 인물과 현재의 인물을 나누지 않는다. 과거와 현재를 구별 못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가 생명의 연장선상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너와 나는 별개의 존재가 아니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일체감을 갖는다. 그 일체감은 그들의 민족의식, 곧 선민사상으로 이어진다. 하나님의 의해 선택된 백성이라는 사실을 자각함으로써 민족의 자존심을 지키고 자자손손 그 대를 이어간다. 우리에게도 이런 정신이 필요하다. 조상들의 잘못은 곧 우리의 잘못이다. 그래서 우리 모두 역사에 대해서 책임적이어야 한다. 책임적인 자아가 일체감을 형성할 때 우리는 더 이상 남의 지배를 받지 않고 선민으로서의 사명을 완수할 것이다. 결국 이스라엘의 교육은 미래지향적이며 공동체적 일원화에 있다고 할 것이다. 신명기의 '쉐마' 정신이 이를 반영하고 있다.

    이 "쉐마"는 이스라엘이 지켜야 할 최고의 소명으로 되풀이되어 나타난다(10:12-13). 그것은 야훼를 사랑하라는 것이다. 이 대계명은 수직적인 동시에 수평적 차원을 보여준다. 수직적 사랑은 야훼가 이스라엘을 처음으로 사랑했기 때문에 이스라엘 역시 야훼를 사랑해야 되는 것이며(10:15), 수평적 차원의 사랑은 야훼께서 가난한 자와 약자, 고아와 과부, 그리고 이방인을 사랑하듯이 이스라엘도 그들을 형제처럼 사랑하고 돌봐주어야 한다는 것이다(신 10:18-19).

    요시야 왕의 종교개혁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짐작되는 신명기 12-26장은 이스라엘이 지켜야 할 율법가운데 특별히 고아와 과부, 그리고 이방인을 돌볼 것을 강조한다. 고대 근동의 약자보호법 역시 대체로 약자의 범위에 고아와 과부를 포함시키지만, 이방인의 보호까지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법은 이방인에 대한 보호를 특별히 강조한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의 정체성과 깊은 관련이 있다. 이스라엘은 고아, 과부, 이방인, 가난한 자와 품삯을 받는 종을 사랑할 때 비로소 야훼 하나님을 순수하게 사랑할 수 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한 때 이집트에서 노예로 있었고 하나님에 의해 해방되었기 때문이다(24:18, 22; 참조. 5:15; 15:15).

    한국에도 중국이 공산화된 이후 많은 화교가 살고 있으며, 월남이 패망한 이후에 한국인과 관련된 월남인들이 이곳에 와서 살고 있다. 이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어떠한가?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인종차별주의로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미국에도 여전히 인종차별주의가 남아 있어 우리 교포들이 피해를 당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런데 우리의 경우는 어떤가? 아마 모르긴 몰라도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인종차별주의자들이 사는 곳이 한국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우물안 개구리라고 했던가? 단일민족, 단일문화가 우리의 자존심이요 장점이라도 된 양 자랑스럽게 떠들어대지 않았는가? 나와 다른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처럼 애석한 일은 없다. 하나만 알 때 독선과 아집이 난무하며 배타적 횡포가 사회를 지배하게 된다. 그래서 독재정권이 한 사람에 의해 그렇게도 오래 지속될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도 한 때 일제의 노예로 있었지 아니한가? 이방인에 대한 사랑! 이것은 이스라엘이 야훼를 사랑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억압받는 모든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는 박애주의와 인본주의에 기초한다. 이는 하나님의 정의를 이룰 때 가능하다. 그 댓가로 땅을 선물로 받고, 이스라엘 자손은 복 받는다. 그러나 그 정의를 바로 세우지 못할 때 자손은 저주를 받고 다른 사람에 의해 지배를 받는다(신 16:20). 이스라엘이 의롭고, 야훼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과 겸손함이 있을 때 땅은 이스라엘의 영원한 기업이 된다.
     
     

    4. 모세의 세번째 설교

     

    모세의 세번째 설교에 해당되는 27-30장에는 가나안에 들어간 후에 지켜야 할 규범이 기록되어 있다. 특히 율법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그렇지 못한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축복과 저주문'은 학자들의 관심을 끌었던 부분이다. 고대 근동의 힛타이트 문헌에 이와 유사한 형태가 나타나기도 하지만, 최근의 학자들은 신명기의 축복과 저주문이 아시리아의 에살하돈 종속조약과 유사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명기의 기록은 하나님의 구원행위에 이스라엘이 자발적으로 응답하고 있다는 점에서 나름대로의 독특성을 지닌다. 31장에서 모세는 후계자 여호수아를 지명하고, 언약궤에 율법을 보존할 것을 명한다. 그리고 32장에서 모세의 마지막 노래가 소개되며, 33장은 모세가 이스라엘의 각 지파를 축복해주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신명기 34장은 모세의 죽음에 대한 기사로 오경의 막을 내린다.

    이상에서 본바와 같이 신명기는 모세의 고별연설로서 이스라엘이 지켜야할 법도를 재차 강조하고 있다. 이 책의 제목에서 풍기는 것처럼 신명기는 제 2의 율법임에는 틀림이 없다. 하지만 엄밀히 말한다면 신명기는 제 2의 새로운 법이 아니라 기왕에 강조된 법을 다시 한번 반복한 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신명기는 흔히 생각한 대로 소위 '복음'에 대치되는 딱딱한 '율법서'는 결코 아니다. 그 안에는 이스라엘이 걸어가야 할 신앙의 표준이 제시되어 있다. 신명기 신학을 크게 구분하면 1)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셨으며(선민사상); 2)땅을 이스라엘에게 선물로 주시고(땅의 신학); 3)그 보답으로 계명을 준수할 것을 명하시며(계약신앙); 4)이는 하나님의 뜻 안에서 사회정의를 실천하는 것(사회정의와 인본주의)으로 구체화된다. 이 중에서 현대의 기독교인에게 특별히 요구된다고 할 수 있는 사회정의 사상, 인권존중사상, 그리고 생명존중사상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5. 신명기의 인권존중 사상
     

    신명기의 인권존중사상은 사회정의를 실천하고자 하는 의지에서 엿보인다. 그 구체적인 실현 방안으로 각 성에 재판관을 두어 공의로 백성을 다스릴 것을 명하고 있다. 재판관은 잘못 판단해서는 안되며 뇌물을 받아서는 결코 안된다. 뇌물은 사람의 눈을 어둡게 하며 의인의 말을 공허하게 만들기 때문이다(신 16:18-20; 비교. 19:15; 19:16-21). 우리도 너무 오랫 동안 의로운 재판관을 구경하지 못했다. 독재정권이 칼을 휘두를 때 사법부는 행정부의 시녀로 전락한 때가 있었다. 은밀한 뇌물은 가난하고 죄 없는 사람만 옥살이를 시켰으며 정의는 땅에 떨어지기도 했다. 고대의 이스라엘에도 그런 못된 재판관들이 있었나 보다. 그래서 신명기법은 재판관의 공의로운 판결을 요구한다.

    인권존중 사상의 두번째 형태는 노예해방제도에서 나타난다. 안식년이 되면 동족인 히브리 남자종이나 여자종을 놓아 자유롭게 해야 하며 빈손으로 내 몰지 말고 후하게 대접해서 보내야 한다. 이것은 이스라엘 모두가 한 때 이집트의 노예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느 누구도 사람아래서 영원한 노예가 될 수 없다(비교. 21:10-14).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백성이며 인간답게 살 권리가 있다. 어느 누구도 인간을 지배할 수 없으며 어떠한 권력도 하나님의 형상을 훼손시킬 수 없다. 우리는 너무나도 오랫동안 유교의 획일적인 지배구조에 익숙한 탓인지 지독히도 서열을 따진다. 서양사람들을 보라. 어른과 어린이가 서로 대등한 자격으로 자유롭게 토론하기도 하고 서로 장난하며 게임도 즐긴다. 반면에 우리사회는 너무 경직되어 있다. 서로 의견을 교환하다가 불리한 입장이 되면 출신과 성분을 따진다. 가진 자와 못가진 자가 너무 쉽게 구별되며 고참과 신참이 인격적인 차별로 이어진다. "이제 나도 주인 행세 한 번 해보자"는 머슴속셈일까?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는 평범한 진리가 있다. 이스라엘은 비록 한시적으로 사람을 노예로 부렸을지라도 그 인권마저 무시하거나 생존의 권리를 박탈하지 말 것을 촉구한다(신 15:12-15; 비교. 출 21:1-11). 특히 동족간의 노예거래는 신중해야 하며 부득이한 경우에는 최대한 그 인권을 존중해야 한다. 한심한 것은 돈 있는 체 하는 졸부들이 식당이나 커피숍에 가서 아무에게나 반말을 지껄이는 행태이다. 봉사자들이 마치 자기 노예라도 되는 모양이다. 그런 이들에게 신명기법을 소개하고 싶다.

    다음으로 도피성제도를 들 수 있다. 신 4:41-43과 19:1-13은 비의도적으로 살인한 사람을 보호하는 도피성제도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고대 근동의 법은 보복법이 그 근간을 이룬다. 보복법에 의하면 살인한 사람은 살인자의 형제나 근족에 의해 보복을 당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보복법은 의도적인 살인이 아닌 경우를 규정하고 있지 않다. 살인자를 죽음으로만 다스리는 고대의 법은 이제 더 이상 인권을 지켜줄 수 없다는 판단에서 신명기 저자는 도피성 제도를 강조하고 있다. 특별히 19장은 구체적인 예까지 명시하면서 실수로 사람을 죽인 사람의 처지를 이해하고, 사회가 그를 보호해 줄 것을 역설한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그 이웃과 함께 산에서 벌목하는 도중 손에 든 도끼가 자루에서 빠져 그 이웃을 맞춰 죽게 한 경우이다. 이처럼 비의도적으로 사람을 죽인 자는 정해진 성으로 도피하여 생명을 보존할 수 있다. 그곳에는 제사장이 있어 도피한 사람의 과실을 판단하여 비의도성이 드러나면 그를 보호해 준다(신 19:5-7). 민수기 35장과 여호수아 20장에도 도피성에 대한 규정이 있는 것을 볼 때 도피성제도는 무고한 생명의 피를 흘리지 않으려는 이스라엘 사회의 배려라고 할 수 있다. 우리 나라에도 이와 유사한 제도가 있었다. 삼한시대에 마한을 중심으로 소도(蘇塗)가 있어 억울하게 죄를 뒤집어쓴 죄인이나 비의도적으로 살인한 죄인들이 피신한 장소로 이용되었다. 소도 에는 천군(天君)이라는 제사장이 있어 이들을 보호하였고 이를 위해 소도 자체로 방위능력까지 갖추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스라엘의 경우와는 달리 실제로 죄를 지은 죄인도 삼한의 소도에 들어가면 아무도 붙잡을 수 없었다고 한다. 이것은 제정일치시대의 종교적 힘을 여실히 보여준 것이라 하겠다. 이스라엘의 도피성제도와 삼한의 소도 제도는 종교적 권위로 인권을 옹호한 귀중한 본보기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삼한의 소도는 천군의 권위를 유지하는 방편으로 활용되었으며, 신성시되는 장소를 물리력으로부터 지키고자 하는 의도도 있었지만 말이다.

    신명기는 또한 여성의 인권에 대해서도 지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이미 결혼한 후라도 아내가 부당한 대우를 받게 되면 장로들에게 가서 하소연할 수 있다. 아내의 처녀성을 의심하는 남자가 있을 경우, 여자의 아버지는 딸의 처녀성을 입증하는 표를 가지고 장로에게 가서 하소연할 수 있다. 처녀성을 밝히는 표가 있다면 아내를 모함한 남자는 벌금을 내고 여인의 권리는 보장된다(신 22:13-19). 여자가 성문 밖에서 강간을 당하면 강간한 남자만 돌로 쳐서 죽이고 여자는 보호된다. 왜냐하면 성밖에서는 아무도 여자를 구해줄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 성안에서 통간하다가 적발되면 남녀 모두 돌 맞아 죽는다. 왜냐하면 성안에서 여자가 소리를 질렀다면 구조의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신 22:23-27). 이 규정은 일견 여자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처사로 보인다. 이웃사람의 눈이 두려워 소리를 지르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이스라엘 사회는 그러한 경우에 여자는 소리를 지르도록 규정하는 법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동시에 간통할 경우 어떤 경우를 막론하고 남자는 무조건 돌로 맞아 죽는다. 단지 여자에게 예외를 인정한 것은 약자인 여자를 보호하고자 하는 의도가 엿보인다.

    무엇보다도 신명기의 인권존중사상은 십일조정신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신 26:12-15은 땅의 소산을 삼 년마다 바치는 십일조는 땅이 없는 제사장 가문의 레위인과, 외국인, 고아와 과부를 위해 바쳐져야 할 것을 명시하고 있다. 십일조는 제사장 계열인 레위인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외국인과 고아와 과부를 위해 쓰여져야 한다. 오늘날의 교회는 십일조를 이런 목적으로 사용하고 있는지 물어보고 싶다. 십일조헌금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정작 그 쓰임새에 대해서는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은 경향이 있다. 십일조는 결국 약자와 가난한자 그리고 소외된 자를 위한 사회구제기금으로 활용되어야 하는 것이 신명기의 정신이다. 반드시 신명기에서 말 한대로 헌금을 사용할 필요는 없다. 오늘날의 상황과 고대 이스라엘의 상황과는 크게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약자를 위해 십일조를 사용해야 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많은 깨달음을 준다.

    그 밖에도 신명기에는 생명존중사상이 강하게 드러난다. 곡식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 것을 명한다든지(25:4; 비교 14:21; 22:6-7), 염소새끼를 그 어미의 젖에 삶지 말라고 명하는 것(14:21; 비교. 22:6-7) 역시 동물들의 생명까지도 함부로 취급하지 말라는 숭고한 정신을 보여준다. 결국 인간을 포함한 모든 자연세계의 피조물이 하나님 사랑의 대상이다.
     
     

    맺음말

     

    모세의 고별연설은 한 마디로 요약된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은 분명 이스라엘을 위한 선물이지만 하나님의 백성과 피조물을 정의롭게 대하지 못할 때 그 땅은 오히려 저주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마지막 고별연설을 한 모세는 이렇게 볼 때 인권을 존중하고 사회정의를 부르짖는 인본주의자였다. 이 인본주의는 인간지상주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정의를 통해 인간이 천부적으로 부여받은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는 것이다. 그것은 겸손한 투쟁이요 거룩한 몸부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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