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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2007-Oct

베드로후서

작성자: blue IP ADRESS: *.91.195.194 조회 수: 72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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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서신의 저자는 사도 베드로이다(벧후 1:1). 본서신을 인용한 가장 오래된 증거물은 신약성경 유다서이다(유 17, 18). 본서신과 베드로전서와의 문체의 차이점은, 베드로전서에서 실루아노를 대서자로 사용한 것과 달리 본서신에서 베드로 자신이 이것을 썼거나 다른 대서자를 사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룸비는 적절히 말하기를, "거짓 교사들을 경고하고 진리에 관심을 가지고 글을 쓰고 있는 위조자가 고의적으로 그런 사도의 이름을 가지며 또 자기가 주장할 수도 없는 체험을 내세운다는 것은 거의 상상할 수 없는 문제이다"라고 하였다. 본서신의 저작 시기는 베드로전서가 기록된 후, 즉 주후 66년 내지 67년경일 것이다.

본서신의 특징적 주제는 이단에 대한 경고이다. 본서신에는 거짓 교사들과 거짓 교훈에 대한 강력한 경고의 말씀이 있다. 유다서와 비교할 때, 본서신에 언급된 거짓 교사들은 미래적인 반면, 유다서에 언급된 거짓 교사들은 현재적이다.

 

 

1장: 신앙의 성숙

1-2절, 문안 인사

[1, 2] 예수 그리스도의 종과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같이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베드로는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과 사도'라고 불렀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말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인정하고 의지하며 그에게 절대 복종하는 자임을 고백한 것이며, '사도'라는 말은 예수님께 사명을 받아 파송된 자임을 증거한 것이다. 그가 예수께 받은 사명이란 하나님의 복음 진리를 널리 전파하고 가르치는 것이었다.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라는 원어는 근래의 권위 있는 한 영어성경(NASV)처럼 '우리의 하나님과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의'라는 뜻일 것이다. 이 구절은 예수님을 우리의 하나님과 구주로 고백한다. 예수님의 완전한 신성(神性)은 그에게 돌려지는 신적 속성들, 그가 행하신 신적 사역들, 그리고 그가 받으시는 신적 영광 등에서도 충분히 증거되지만, 무엇보다 첫째로 그에게 돌려지는 신적 명칭들에서 증거된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거나 주님이라고 부르는 구절들이 다 여기에 해당하지만, 특히 그를 '하나님'이라고 직접적으로 부른 구절들이 그러하다.

예를 들어, 요한복음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한복음 20:28,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디도서 2:13,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요한일서 5:20,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

'우리의 하나님과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의'란 신성을 가지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이루신 대속(代贖)의 의(義)를 가리킨다. '의를 힘입어'라는 말은 '의 안에서' 또는 '의로 말미암아'라는 뜻이다. 우리의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그 의(義) 안에서 시작되고 견고케 된다.

베드로는 본서신을 받는 성도들을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같이 받은 자들'이라고 표현하였다. 성도들의 믿음은 '보배로운' 믿음이다. 세상의 금은 보화로는 천국과 영생을 얻을 수 없으나 참된 믿음으로는 그것을 얻을 수 있다. 마가복음 16:16,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성도의 믿음은 참으로 보배이다.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이라는 말은 참된 믿음이 모든 성도들에게, 남녀 노소, 빈부 귀천, 또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이 없이 동일하게 보배로움을 증거한다. 보배로운 성도의 믿음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 공통적이다. 디도서 1:4, "같은[공동적] 믿음을 따라 된 나의 참 아들 디도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구주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베드로는 성도들이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을 더 많이 얻기를 기원하였다.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아는 것이 영생이다(요 17:3). 이제 성도들은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 때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을 더욱 많이 누리게 될 것이다.

3-4절, 구원의 내용과 목적

[3]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능력이 생명과 경건에 관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었다고 증거한다. '신기한'이라는 원어(데이오스)는 '신적인'이라는 뜻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능력의 일이다. 죄로 인하여 죽었던 영혼들을 다시 살게 하는 것은 아무 인간도 할 수 없는 일이요 오직 하나님께서만 하실 수 있다. 예수께서는 그의 신적 능력으로 우리를 구원하셨고 우리에게 참된 생명 곧 영원한 생명을 주셨고 또 하나님과 교통하고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참된 경건을 허락하셨다. 우리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과 그의 이름을 의지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섬길 수 없고 그와 교통할 수 없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을 앎으로써 왔다. 베드로는 구원의 하나님을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라고 표현한다. 하나님의 구원 사역은 독생자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심으로 이루어졌다. 독생자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셨다.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또 '덕으로써'라는 말은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선하신 성품 곧 그의 긍휼과 사랑으로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

[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베드로는 우리의 구원을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이라고 표현한다. '이로써'라는 본절의 초두의 말은 앞절에 언급한 '영광과 덕으로써'라는 말을 가리킨다.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은 바로 우리가 받은 구원의 내용, 즉 영생과 천국과 부활의 소망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이 영광스런 구원을 소망으로 주셨고 약속하셨다. 로마서 8:23, 24,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게 하려 하심이었다. '신의 성품'이라는 말(데이아 퓌시스)은 '신적인 성품'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구원받기 전의 상태와 대조된다. 베드로는 사람의 구원받기 전의 상태를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구하는 삶으로 표현하였다. 사람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대로 거룩하고 의롭게 창조되었었다. 그러나 범죄한 이후 사람은 정욕적이게 되었고 세상의 썩어질 것을 구하는 자가 되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의 구원하심으로 본성이 회복되어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한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이 구원의 목적은 법적으로는 이미 완전하게 이루어졌다.

결론적으로, 1절부터 4절까지는 구원의 내용과 목적에 대해 증거한다. 첫째로, 성도가 받은 구원은 영원한 생명이며 그것은 하나님의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이다. 그것은 영광의 부활과 천국에서의 복된 삶을 포함한다. 이것은 세상의 금은 보화로 살 수 없는 보화들이다. 둘째로, 성도의 구원의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적인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 신적인 성품이란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함을 가리킨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들에게는 법적으로 완전하게 다 이루어졌고 장차 영화롭게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세상에서도 죄악되고 허무한 옛 생활 방식을 다 버리고 하나님만 바라며 성경 말씀과 성령의 인도로 거룩하고 선한 삶을 힘써야 한다.

5-11절, 힘써야 할 일곱 가지 내용과 그 이유

[5-7]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더욱 힘써'라는 원어는 '모든 열심을 보이라'는 뜻이다. 베드로는 우리가 우리의 믿음에 다음 일곱 가지의 내용을 공급하는 일에 모든 열심을 보이라고 교훈한다.

첫째는 덕이다. 덕은 선한 인품을 가리킨다. 참된 믿음에는 선한 인품이 필요하다. 믿음이 인격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면 죽은 믿음이든지 아니면 심히 부족하고 결함이 있는 믿음일 것이다. 그러므로 믿는 자는 선한 인품, 덕스러운 인품을 갖추도록 힘써야 한다.

둘째는 지식이다. 우리의 믿음은 덕 뿐만 아니라, 지식도 필요하다. 그 지식은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지식이다. 하나님의 진리는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데, 그것은 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참으로 믿은 자는 성경 말씀을 주야로 읽고 듣고 배우고 묵상하고 연구하고 암송하기를 힘써야 한다.

셋째는 절제이다. 절제는 우리의 지식에 있어서 필요하다. 우리는 하나님에 관하여 지극히 조금 알고 있을 뿐이다. 또 그 지식은 전적으로 성경책에 의존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에 밝히 계시된 것 만큼만 하나님을 알도록 해야 할 것이다. 고린도전서 4:6,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가지고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먹지 말게 하려 함이라."

또한 절제는 우리가 누리는 즐거움에 있어서도 필요하다. 비록 죄되는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우리에게는 너무 육신적 즐거움에 빠지지 않는 절제가 필요하다. 고린도전서 6:13, "식물은 배를 위하고 배는 식물을 위하나 하나님이 이것 저것 다 폐하시리라. 몸은 음란을 위하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며 주는 몸을 위하시느니라." 고린도전서 9:25,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우리는 절제의 생활을 힘써야 한다.

넷째는 인내이다. 우리는 세상에서 겪는 여러 가지 고난 중에서 오래 참고 인내해야 한다. 우리는 또한 우리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릴 때에도 오래 참고 기다려야 한다. 또 우리가 형제를 사랑할 때도 인내가 필요하다. 바울은 증거하기를, "사랑은 오래 참고 . . .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 . .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라고 하였다(고전 13:4, 7). 참된 믿음의 걸음에는 인내가 필요하다.

다섯째는 경건이다. 경건은 항상 하나님을 의식하며 두려워하며 사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태도요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는 태도이다. 하나님과 항상 교제하고 그와 동행하기를 원하는 자는 경건한 자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경건은 모든 신자에게 필요하다.

여섯째는 형제 우애이다. 베드로는 베드로전서에서 우리가 서로 같은 생각과 같은 감정을 가지고 형제를 사랑하고 상대에 대해 부드러운 마음을 가지고 친절한 생각을 해야 한다고 가르쳤다(벧전 3:8).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서로 사이좋게 지내며 살기를 원하신다. 로마서 12:18,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마지막으로 일곱째는 사랑이다. 이 '사랑'이라는 말(아가페)은 '형제 우애'라는 말(필라델피아)보다 더 강한 뜻을 가진다. 이것은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같은 사랑, 즉 '무조건적, 희생적 사랑'을 나타내는 말이다. 주께서는 우리에게 이런 사랑으로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명령하셨고 우리에게 용서를 비는 형제의 죄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명령하셨다(마 5:44; 18:22).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성경은 말한다.

[8, 9]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이런 것이 없는 자는 소경이라 원시치 못하고 그의 옛 죄를 깨끗케 하심을 잊었느니라.

만일 우리에게 위와 같은 것들이 있으면 우리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참 지식에 있어서 무기력하거나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겠지만, 이런 것이 없는 자는 내세와 천국을 바라보지 못하는 소경과 같고 하나님께서 그의 옛 죄들을 깨끗케 해주셨음을 잊어버린 자와 같다. '게으르지'라는 원어(아르고스)는 '비활동적인, 빈약한, 무기력한'이라는 뜻이 있다.

[10]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

베드로는 결론적으로 다시 강조하기를,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고 한다. '부르심과 택하심'은 우리의 구원을 표현하는 말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얻은 증거는 우리의 진실한 믿음과 회개이다. 그러나 우리는 앞에서 언급한 일곱 가지의 내용, 즉 믿음에 덕과 지식과 절제와 인내와 경건과 형제 우애와 사랑을 공급함으로써 우리의 구원을 굳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베드로는 우리가 더욱 힘써 우리의 구원을 굳게 해야 할 이유로 다음의 두 가지를 언급했다. 첫째는 우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원문에는 본절 후반부에 '왜냐하면'이라는 말이 있다. 우리는 순종의 행위를 통해 믿음의 승리자가 될 수 있다. 승리의 비결은 계속 순종하기를 힘쓰는데 있다.

[11]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원문에는 본절 초두에도 '왜냐하면'이라는 말이 있어 우리가 더욱 힘써 우리의 구원을 굳게 해야 할 두번째 이유를 나타낸다. 그 이유는 우리가 이같이 행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 즉 천국에 넉넉히 들어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성도의 구원은 순종 생활 속에서 더욱 확실해진다. 범죄함은 성도에게서 구원의 확신을 빼앗아 갈 수도 있다. 그러나 다윗의 고백처럼, 그가 회개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시켜 주실 것이다(시 51:12).

결론적으로, 1절부터 11절까지는 구원의 내용과 목적, 그리고 이를 위해 성도가 자신의 믿음에 더하여야 할 일곱 가지 내용과 그것을 힘써야 할 두 가지 이유를 계시한다. 첫째로, 성도의 구원의 내용은 참된 생명 곧 영원한 생명이며 그것은 하나님의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이다. 둘째로, 성도의 구원의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적인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 신적인 성품이란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함을 가리킨다. 셋째로, 이 목적을 위해 성도가 자신의 믿음에 더하여야 할 일곱 가지 내용은 덕과 지식과 절제와 인내와 경건과 형제 우애와 사랑이다. 넷째로, 성도가 이것을 힘써야 할 이유는 이렇게 함으로써 믿음의 걸음에서 실패치 않고 영원한 천국에 넉넉히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에 덕과 지식과 절제와 인내와 경건과 형제 우애와 사랑을 더하기를 더욱 힘쓰자.


12-21절, 예수님의 영광에 대한 두 가지 증거


[12, 13] 이러므로 너희가 이것을 알고 이미 있는 진리에 섰으나 내가 항상 너희로 생각하게 하려 하노라. 내가 이 장막에 있을 동안에 너희를 일깨워 생각하게 함이 옳은 줄로 여기노니.

우리는 성경 진리들을 이미 알고 있어도 그것들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 읽고 또 읽어야 하고 학생들이 학교에서 배운 내용을 집에서 복습하듯이 복습하고 또 복습해야 한다. '이 장막에 있을 동안에'라는 말은 살아 있을 동안을 가리킨다. '장막'은 육체를 가리키는데, 그것은 장막 혹은 천막이 영구적인 집이 되지 못하고 또 그 용도도 이동하는 것이듯이 우리의 육체도 영구적이지 못하고 늙고 쇠하여 마침내 한 번은 죽을 것이며 땅에 묻히면 썩을 것이다. 베드로는 자신이 죽기 전에 유익한 모든 교훈을 다 함으로써 성도들을 일깨우는 것이 옳다고 여겼다.

[14] 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지시하신 것같이 나도 이 장막을 벗어날 것이 임박한 줄을 앎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지시하신 것같이'라는 말은 요한복음 21장의 말씀을 생각나게 한다. 거기에 보면, 주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라고 기록되어 있다(요 21:18, 19). 베드로는 자신의 장막을 벗어날 것 곧 자신의 죽음이 임박함을 느끼고 있었고 그러기 때문에 더욱 성도들을 교훈하였다.

[15] 내가 힘써 너희로 하여금 나의 떠난 후에라도 필요할 때는 이런 것을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

베드로후서는 베드로의 유언적 내용이었다. 베드로는 자신의 죽은 후에도 성도들에게 필요한 때 이 진리가 생각나게 하려고 힘써 교훈하였다. 여기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목적이 있고 우리에게 성경이 필요한 이유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목적대로 성경을 주야로 묵상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늘 바로 깨닫고 충만한 은혜와 유익을 얻어야 할 것이다.

[16]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공교히 만든 이야기를 좇은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베드로는 지금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에 대해 다시 한 번 더 확실하게 증거하기를 원한다. 그것은 뒤에 2장에 나타난 대로 이단들이 주님을 부인하였기 때문이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바로 아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기본적인 내용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란 그의 신적 능력을 가리킨다. 앞에 1절에서 우리가 생각한 대로, 예수님은 '우리 하나님과 구주'이시다.

또 '그의 강림하심'이라는 말은 그가 본래 하늘에 계신 신적 존재이심을 나타낸다. 그것은 요한이 요한복음 서두에서 밝히 증거한 바이다. 요한복음 1:1, 14,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또 예수께서도 친히 증거하시기를,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다(요 3:13).

베드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영광이 '공교히 만든 이야기를 좇은 것이 아니고 자신들이 그의 크신 영광을 친히 본 자라고 증거하였다. 신약성경에 증거되어 있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사실들 즉 기독교 복음의 내용은 인간이 만들어낸 허구(虛構)나 문예 창작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역사적 사건들에 대한 진실한 증거들이요 사실적 보도들이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 사실들에 대한 증인들이었다. 요한일서 1: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17, 18]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저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이 소리는 우리가 저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서 나옴을 들은 것이라.

베드로는 자신이 친히 보았던 주의 크신 위엄과 영광에 대해 증거한다. 그것은 마태복음 17장에 기록된 대로 그와 다른 두 제자들이 주님과 함께 높은 산에 올라갔을 때 주께서 영광스럽게 변화되셨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늘로부터 친히 음성으로 그에 대해 증거하여 주신 것을 가리킨다. 그것은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내용이었다. 이 때 예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얻으셨다. 이것이 예수님의 영광에 대한 베드로의 첫번째 증거이었다.

[19] 또 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데 비취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가하니라.

베드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님의 영광에 대한 두번째 증거를 말한다. 그는 그것을 '더 확실한 예언'이라고 표현하였다. 그것은 그의 첫번째 증거 즉 그가 친히 보았던 증거보다 더 확실한 증거이다. 그것은 구약성경의 증거를 가리킨다. 성경책은 인간의 그 어떠한 증거보다 더 확실한 증거의 책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의 확실함을 위해 성경책을 우리에게 주셨다. 성경 말씀은 어두운 곳을 비취는 등불과 같다. 어두운 밤에 불빛이 없다면 얼마나 답답하고 불편할 것인가? 성경이 없었다면, 우리는 이 어두운 죄악 세상에서 하나님과 인간과 구주에 대해 바로 알지 못했을 것이다.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라는 말은 우리가 성경을 읽고 연구하고 묵상할 때 바른 깨달음이 생기는 것을 가리킨다고 본다. 디모데후서 3:15,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책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와 그 속죄의 복음을 바로 깨달을 때까지 성경책을 가까이 하며 읽어 나가야 할 것이다.

[20]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베드로는 성경이 예수님에 대한 중요한 증거이지만 그것을 사사로이 해석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그것은 주관적인 해석을 주의하라는 뜻이다. '먼저 알 것은'이라는 표현은 이것이 기본적으로 중요함을 보인다. 성경이 중요한 만큼 그것을 해석하는 것도 중요하다. 건전한 성경 해석의 방법은 우선 문법적으로, 문맥적으로 해석하는 것이고, 그 다음에 역사적 배경을 이해하면서 해석하는 것이고, 마지막으로 성경을 전체적 통일성이 있게 해석하는 것이다. 물론, 성경을 깨닫게 하시는 이는 오직 하나님이시므로 성경을 연구하는 이들은 하나님의 깨닫게 하시는 은혜를 구하면서 연구해야 할 것이다.

[21]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우리가 성경을 사사로이 해석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책이기 때문이다. 참된 예언은 사람의 뜻으로 주어진 적이 없고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들 곧 참 선지자들이 말한 것이다. 바울 사도도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고 증거하였다(딤후 3:16).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해석할 때 매우 조심해야 하고 자기의 주관대로 제멋대로 해석해서는 안된다. 성경에 대한 잘못된 해석은 하나님 앞에서 큰 죄가 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13절부터 21절까지에서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받는다. 첫째로, 우리는 이미 아는 진리도 계속 다시 기억하고 복습해야 한다. 그것이 베드로가 편지를 한 목적이었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목적이다.

둘째로,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영광이 사람의 공교히 만든 이야기를 좇은 것이 아니고 제자들이 친히 본 바요 구약성경이 확실히 예언한 바임을 확실히 알고 믿고 확신해야 하겠다. 예수님을 바로 알고 바로 믿어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생활을 할 수 있고 이단 사설에 유혹을 받지 않을 수 있다.

셋째로, 우리는 성경을 통해 예수님의 진리가 마치 샛별이 떠오르듯이 밝히 깨달아질 때까지 성경을 경건하게 읽고 묵상하되 성경을 사사로이, 주관적으로 해석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겠다.

 

 

 

2장: 거짓 선생들

1-9절, 거짓 선생들의 교훈과 결말

[1] 그러나 민간에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저희는 멸망케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의 영광에 대한 말씀 곧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진리가 확실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부정하는 거짓 선생들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구약 교회에는 역사상 거짓 선지자들이 빈번히 나타났었다.

참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代言)하는 자이지만, 거짓 선지자는 거짓말을 하는 자이다. 거짓말들의 근원은 사탄이다. 요한복음 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참과 거짓, 그리고 진리와 이단의 구별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다. 이사야 8:20,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좇을지니 그들의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이 정녕히 아침 빛을 보지 못하고[그들 속에 빛이 없음이니라]."

신약 교회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을 것이다. 이것은 예언이며 이 예언은 역사상 성취되었다. 예수께서도 예언하시기를,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라고 하셨다(마 24:24).

거짓 선생 곧 이단자는 '멸망케 할 이단'을 가르치는 자이다. 즉 이단 사상은 하나님의 구원의 진리와 아주 다르다. 그것은 사람에게 멸망을 준다. 왜냐하면 이단의 본질은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부정하는 곳에 생명과 구원이 없다. 요한복음 3:36,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요한일서 5:12,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이단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부정하고 속죄의 주님 자신을 부정한다.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요한일서 4:1-3,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이제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

이단자들은 결국 다른 예수를 전하는 자들이다. 고린도후서 11:3, 4, "뱀이 그 간계로 이와를 미혹케 한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만일 누가 가서 우리의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

그들은 실상 하나님의 종들이 아니고 마귀의 종들이다. 고린도후서 11:13-15, "저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단의 일군들도 자기를 의의 일군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 일이 아니라. 저희의 결국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

본절은 또한 거짓 선생들의 결말이 멸망이며 그 멸망이 임박하다는 것도 증거한다. 마태복음 25:41,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요한계시록 19:20, "짐승이 잡히고 그 앞에서 이적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도 함께 잡혔으니 이는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이적으로 미혹하던 자라. 이 둘이 산채로 유황불 붙는 못에 던지우고."

[2] 여럿이 저희 호색하는 것을 좇으리니 이로 인하여 진리의 도가 훼방을 받을 것이요.

거짓 선생들의 또 다른 하나의 특징은 호색함 혹은 음란함이다. 본장의 뒷부분에도 이런 특징이 계속 언급되어 있다. 10절,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서 행하며." 14절, "음심이 가득한 눈을 가지고 범죄하기를 쉬지 아니하고 굳세지 못한 영혼들을 유혹하며." 18절, "저희가 허탄한 자랑의 말을 토하여 미혹한데 행하는 사람들에게서 겨우 피한 자들을 음란으로써 육체의 정욕 중에서 유혹하여."

이단자들의 이런 부도덕함으로 인하여 진리의 도가 세상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게 될 것이다. 음란함은 인간의 양심에도 거스리는 일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구원의 진리를 전한다는 자들이 거룩과 의(義)를 저버리고 음란함에 거한다면 구원의 진리는 여지 없이 땅에 떨어지게 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도 이단자들은 하나님께 욕을 돌리며 하나님의 거룩한 구원 운동을 방해하는 하나님의 원수들이다.

[3] 저희가 탐심을 인하여 지은 말을 가지고 너희로 이를 삼으니 저희 심판은 옛적부터 지체하지 아니하며 저희 멸망은 자지 아니하느니라.

거짓 선생들의 또 다른 하나의 특징은 탐심이다. 하나님을 참으로 섬기지 않는 자들은 대체로 이 세상을 유일한 가치로 여길 것이다. 이단자들이 그러하다. 저희는 이 세상의 물질적 이익을 구하는 자들이며 이를 위해서는 말을 지어내기도 한다. 저들은 진리의 사람들이 아니다.

본절은 거짓 선생들의 결말에 대해 다시 증거한다. 저들이 받을 심판과 멸망은 옛날부터 지체하지 않고 잠자지 않는다. 하나님의 심판과 저들에게 임할 멸망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4]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

베드로 사도는 거짓 선생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확실하다는 것을 몇 가지 사실들을 들어 증거하였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범죄한 천사들을 지옥에 던져 넣으신 사실이다. 본절과 다음절에서 '용서치'라고 번역된 말(페도마이)은 '아끼지'라고 번역되어야 더 좋을 것이다. 또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라는 구절은 전통 사본에는 '어두움의 사슬로 묶어 지옥에 던져'라고 되어 있다. 범죄한 천사들 중 일부분은 지금도 어두운 지옥에 갇히어 있고 마지막 심판을 기다리고 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거짓 선생들도 지옥에 던지실 것이다.

[5] 옛 세상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치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

둘째로, 거짓 선생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확실성은 노아 시대의 홍수 심판에서도 증거된다. 노아는 의를 전파하는 자(디카이오쉬네스 케뤽스)이었다. 음란하고 강포한 그 시대에 노아는 아내를 사랑하고 가정의 거룩을 지킨 자이었음에 틀림 없었고 또 방주를 만들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온유하고 겸손하게 순종한 인격자이었다. 노아는 하나님의 의를 말과 행실로 증거한 자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노아의 여덟 식구 외에 불경건한 당시의 모든 사람들에게는 홍수를 내려 멸망시키셨다. 불경건한 자들이란 하나님을 부정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저버린 자들을 가리킨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거짓 선생들에게도 멸망의 심판을 내리실 것이다.

[6]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치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

베드로 사도는 거짓 선생들의 심판과 멸망의 확실성을 증거하는 세번째 내용으로서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사건을 든다. '멸망하기로 정하여'라는 원어는 '뒤집어 엎어 정죄하여'라는 뜻이다. 창세기 19:24, 25, "여호와께서 하늘 곧 여호와에게로서 유황과 불을 비같이 소돔과 고모라에 내리사 그 성들과 온 들과 성에 거하는 모든 백성과 땅에 난 것을 다 엎어 멸하셨더라." 이 사건은 후세에 경건치 않은 자들에게 본이 된다.

[7, 8] 무법한 자의 음란한 행실을 인하여 고통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이 의인이 저희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을 상하니라.)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은 극도로 문란해진 성 도덕에서 나타났었다. 그것은 동성애라는 것으로 나타났다(창 19장). 인간 사회의 도덕적 부패는 음란 곧 성적인 타락으로 나타난다. 소돔과 고모라가 그러했고 가나안 7족속들이 그러했다(레 18장). 가나안 7족속들에게는 근신상간, 동성애, 짐승과의 음란 등의 악들이 있었다. 이런 악들은 오늘날도 세계 곳곳에 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옛날 소돔과 고모라에 대하여 가지셨고 가나안 7족속들에 대해 가지셨던 진노와 심판이 오늘날 지구에도 쌓여지고 있고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올바르게 살고자 했던 의로운 롯은 그 음란한 사회 속에서 심적으로 큰 고통을 당하였었다. 오늘날도 성도들이 거룩하고 경건하게 살고자 할 때 롯과 같은 고통을 느끼게 될 것이다. 특히 현대 사회와 현대 문명은 이전의 그 어떤 시대보다도 더욱 음란한 사회이며 음란한 문명이다. 현대 사회는 성경이 예언하는 하나님의 마지막 대심판을 준비하고 있다. 성도들은 이런 음란한 사회 속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다.

[9] 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시고 불의한 자는 형벌 아래 두어 심판날까지 지키시며.

이 세상이 아무리 악하고 음란할지라도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들, 곧 노아와 같고 롯과 같은 자들은 하나님의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불의한 자들의 영혼들은 지옥에 던지우고 수감되어 마지막 심판날을 기다리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거짓 선생들도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1절부터 9절까지에서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받는다. 첫째로, 우리는 거짓 선생들 즉 이단자들을 분별해야 한다. 어떻게 분별할 수 있는가? 오직 신구약 성경이 분별의 기준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성경의 바른 지식이 필요하고 성경적, 역사적 기독교 신앙의 개요에 대한 바른 지식이 필요한 것이다. 그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속죄에 관한 교리들이다. 우리는 새 것을 항상 조심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거짓 선생들의 특징들인 호색과 탐심을 경계해야 한다. 이 세상이 성적으로 문란할지라도 성도는 거룩함과 절제를 가져야 하고 지켜야 한다. 또 이 세상이 물질 만능을 믿는 세상일지라도 성도는 돈을 사랑치 말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자족하며 사는 자이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해야 한다. 노아 시대의 홍수 심판과 소돔과 고모라 시대의 유황불 심판은 역사적 사건들이었다. 불경건하고 음란했던 저들을 심판하셨던 하나님은 오늘날도 변함이 없으시다. 이 세상은 결국 불경건과 음란으로 하나님의 심판과 멸망을 당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성도는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며 모든 종류의 악에서 떠나기를 힘써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죄짓는 것을 두려워해야 한다.
5; line-height: 130%;" align="justify">10-22절, 거짓 선생들의 특징들

앞부분에서도 거짓 선생들의 특징들이 언급되었으나 본문에서는 그것들이 좀더 많이 증거된다.

[10]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서 행하며 주관하는 이를 멸시하는 자들에게 특별히 형벌하실 줄을 아시느니라. 이들은 담대하고 고집하여 떨지 않고 영광 있는 자를 훼방하거니와.

거짓 선생들의 첫번째 특징은 성적인 부패 즉 음란이다. 저들은 육체의 감정을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 행한다. 음란이 더러운 까닭은 하나님이 정해주신 부부 관계의 법을 벗어난 죄이기 때문이다. 모든 죄는 자신을 더럽히고 결국 자신과 세상을 불행케 만든다.

거짓 선생들의 두번째 특징은 하나님의 참된 종들을 멸시하고 비난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교회 안에 합법적 권위를 가진 다스리는 자들[치리자들]을 세우셨다. 그들이 목사와 장로들이다. 그러나 거짓 선생들은 하나님의 참된 목사들과 장로들을 멸시하고 건방지고 그들을 비난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담대하다'는 원어(톨메테스)는 '건방지다, 주제 넘게 행하다'는 뜻이다.

물론 교인들이 목사들과 장로들을 전혀 비평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목사들과 장로들도 인간이기 때문에 부족들과 실수들이 있을 것이고 그것들을 지적하는 것은 정당할 수 있다. 그러나 교인들은 그들을 비평하는 것을 극히 조심해야 한다. 아니, 그들을 자주 비평하지 않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러한 비평을 기뻐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저들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종들이며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종들이기 때문에 저들을 비난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명예에 손상이 될 것이다. 또 하나님의 종들을 비난하는 것은 자신들에게도 유익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종들을 통해 교훈을 받고 인도함을 받기 때문이다. 또 하나님의 종들을 비난하는 것은 교회에 덕과 유익이 되지 않는다. 그런 비난은 교회를 건설하는 대신에 그것을 파괴시킨다. 그러므로 목사와 장로들에 대한 비난은 극히 조심해야 한다.

[11-13] 더 큰 힘과 능력을 가진 천사들이라도 주 앞에서 저희를 거스려 훼방하는 송사를 하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이 사람들은 본래 잡혀 죽기 위하여 난 이성 없는 짐승 같아서 그 알지 못한 것을 훼방하고 저희 멸망 가운데서 멸망을 당하며 불의의 값으로 불의를 당하며 낮에 연락을 기쁘게 여기는 자들이니 점과 흠이라. 너희와 함께 연회할 때에 저희 간사한 가운데 연락하며.

저 거짓 선생들보다 더 큰 힘과 능력을 가진 천사들이라도 하나님 앞에서 그들을 거스려 훼방하는 송사를 하지 아니하였다. 그만큼 남을 비난한다는 것은 조심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이 거짓 선생들은 이성 없는 짐승 같이 자신들이 알지 못하는 것들을 비난한다. 그들의 비난은 이치에 맞는 정당한 비평이 아니다.

그들의 결말은 앞부분(3절)에서도 언급되었지만, 다시 언급된다. 그들은 본래 잡혀 죽기 위해 난 짐승과 같으며 멸망 가운데서 멸망을 당할 자들이다. 또 불의의 보응을 받을 자들이다.

거짓 선생들의 정욕적 행위는 또한 육체적 쾌락을 구하는 것으로 표현된다. 저들은 다른 사람들이 땀 흘려 일하는 낮에 육신적 쾌락을 기쁘게 여기는 자들이다. 저들은 술과 춤과 음행을 즐기는 자들이다. 이런 자들이야말로 거룩한 교회 안에서 점과 흠이다. 저들은 선생들이라는 이름을 가졌으나 실상은 마귀적이요 세상적이요 죄악된 자들이다.

[14-16] 음심이 가득한 눈을 가지고 범죄하기를 쉬지 아니하고 굳세지 못한 영혼들을 유혹하며 탐욕에 연단된 마음을 가진 자들이니 저주의 자식이라. 저희가 바른 길을 떠나 미혹하여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좇는도다. 그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 자기의 불법을 인하여 책망을 받되 말 못하는 나귀가 사람의 소리로 말하여 이 선지자의 미친 것을 금지하였느니라.

또 다시 거짓 선생들의 음란함이 언급된다. 저들은 음심이 가득한 눈을 가지고 범죄하기를 쉬지 않고 굳세지 못한 영혼들, 즉 신앙적으로, 인격적으로 연약한 자들을 유혹한다.

음란한 세상 속에서 또 거짓 선생들의 음란한 유혹에 대처하여, 성도들은 건전한 부부 관계를 지켜야 한다. 고린도전서 7:1-5, "너희의 쓴 말에 대하여는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 음행의 연고로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 남편은 그 아내에게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라. 아내가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이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의 절제 못함을 인하여 사단으로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거짓 선생들의 세번째 특징은 물질적 탐욕이다. 저들은 탐욕에 연단된 마음을 가진 자들이다. 반복하여 탐심을 품으므로 그들의 마음은 탐욕에 연단되었다. 저들은 바른 길을 저버리고 곁길로 간 자들이며 마치 옛날 불의의 삯을 사랑하여 가다가 말 못하는 나귀가 하나님의 시킴을 받아 말로 책망했던 발람 선지자의 길을 좇는 자들이다. 베드로는 물질적 탐심과 세상적 명예심을 따라 간 발람의 행위를 '미친 것'이라고 표현한다. 또한 그는 저 거짓 선생들을 '저주의 자식'이라고 말함으로써 저들의 결말이 어떠할 것을 다시 한 번 더 분명히 증거하였다.

[17-19] 이 사람들은 물 없는 샘이요 광풍에 밀려 가는 안개니 저희를 위하여 캄캄한 어두움이 예비되어 있나니 저희가 허탄한 자랑의 말을 토하여 미혹한데 행하는 사람들에게서 겨우 피한 자들을 음란으로써 육체의 정욕 중에서 유혹하여 저희에게 자유를 준다 하여도 자기는 멸망의 종들이니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됨이니라.

거짓 선생들은 '물 없는 샘'과 같아서 그 속에 참된 생명수 샘물과 진리의 말씀이 없다. 저들은 광풍에 밀려 가는 안개에 불과하다. 저들을 위해 캄캄한 어두움이 영원히 예비되어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저들을 향해 내리실 영원한 지옥 형벌이다.

거짓 선생들의 음란한 특징이 다시 언급된다. 저들은 허영의 부풀린 말을 하면서 미혹한데 행하는 자들에게서 참으로 피한 자들을 음란으로써 육체의 정욕 중에서 유혹한다. '겨우'라는 원어는 전통 사본에는 '참으로'라는 말(온토스)이다. 저희가 그들에게 자유를 약속하지만, 저희 자신이 부패(프도라, 혹은 '멸망')의 종들이다.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된다.

[20-22] 만일 저희가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저희에게 나으니라. 참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저희에게 응하였도다.

사람이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더러움 가운데 떨어져 산다면, 그의 형편은 주를 알기 전보다 더 나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저 거짓 선생들은 바로 그런 자들이다. 그것은 마치 개가 토한 것을 다시 먹는 것과 같고 돼지가 씻은 후에 더러운 구덩이에 누운 것과 같다.

결론적으로, 10절부터 22절까지의 내용을 요약하면, 거짓 선생들의 특징들은 첫째 더러운 정욕 가운데 행하는 것, 곧 음란이다. 저들은 더러운 정욕 가운데 행하고 낮에 연락을 즐기며 음심이 가득한 눈을 가지고 연약한 사람들을 유혹한다. 둘째로, 저들은 하나님께서 교회에 정당하게 세우신 목사들과 장로들을 멸시하고 비난한다. 저들은 건방지고 알지 못하는 것을 비난한다. 셋째로, 저들은 탐욕적이다. 저들은 탐욕에 연단된 마음을 가지고 있다. 저들은 돈을 사랑하는 자들이다. 그리고 거짓 선생들의 결말은 멸망이요 저주요 캄캄한 어두움의 처소 즉 지옥이다.

우리는 말세에 나타날 거짓 선생들을 조심해야 한다. 우리는 거짓 선생들의 사상적 오류들과 윤리적 문제점들을 분별하고 저들을 멀리해야 한다. 우리는 특히 더러운 정욕에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거룩함이다. 거룩한 자들이 하나님의 평강과 형통의 복을 받아 누릴 것이다. 우리는 또한 하나님께서 교회에 세우신 목사들과 장로들을 멸시하거나 비난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디모데전서 5:19, "장로에 대한 송사는 두세 증인이 없으면 받지 말 것이요." 마지막으로, 우리는 모든 탐심을 버려야 한다. 우리는 세상에서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다면 만족하며 살아야 한다(딤전 6:7, 8).

 

 

3장: 주의 날

1-7절, 주의 재림을 부정하는 자들

[1, 2]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이제 이 둘째 편지를 너희에게 쓰노니 이 둘로 너희 진실한 마음을 일깨워 생각하게 하여 곧 거룩한 선지자의 예언한 말씀과 주 되신 구주께서 너희의 사도들로 말미암아 명하신 것을 기억하게 하려 하노라.

베드로 사도가 두 개의 편지를 쓴 목적은 성도들의 진실하고 순진한 마음을 일깨워서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게 하려 함이었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두 가지로 표현하였다. 첫째는 '거룩한 선지자의 예언한 말씀'이다. 그것은 구약성경을 가리킨다. 둘째는 '주 되신 구주께서 너희의 사도들로 말미암아 명하신 것'이다. 그것은 신약성경을 가리킨다. 그가 쓰고 있는 본서신도 그 중에 하나이다. 여기에 하나님의 의도하신 바가 나타나 있다. 우리는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을 항상 읽고 들음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속에 그의 진리와 교훈과 뜻이 풍성히 거하여 그것을 행함으로 그에게 영광이 되기를 원하신다.

[3, 4]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좇아 행하며 기롱하여 가로되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하나는 말세에 주의 재림을 부정하는 불신앙적 선생들이 나타날 것이라는 내용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정욕을 좇아 행하며 재림의 진리를 비웃고 조롱한다. 앞장에서도 언급한 바대로, 음란은 거짓 선생들의 한 특징이다. 또 저들은 주의 재림의 약속을 부정하며 말하기를 조상들이 죽은 후에도 여전히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고 한다. 예언된 종말적 대변혁의 징조들이 없다는 것이다.

오늘날 자유주의 신학의 출현은 이러한 성경 예언의 성취이다. 현대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예수님의 재림을 믿지 않고 공공연히 부인한다. 자유주의 신학자 라인홀드 니이버는 비극을 너머서라는 그의 책에서 말하기를, "기독교의 교리 중에 그리스도의 재림의 소망보다 더 속임과 착각으로 인도한 교리는 없다"고 하였다. 이러한 자들은 사탄의 종들로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넘어뜨리려고 불신앙과 이단을 전파한다. 교회의 역사상 끊임 없이 일어났던 배교 운동들의 은밀한 사령탑에는 가장 우두머리에 사탄이 있다. 우리 모두는 이러한 불신앙적 사상들을 분별하고 대항해야 한다.

[5-7]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저희가 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이로 말미암아 그 때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 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베드로는 주의 재림을 부정하는 이단자들을 두 가지 점을 들어 반박한다. 첫째로, 그는 하늘과 땅이 옛적부터 있는 것은 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음을 상기시킨다. 창세기 1장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께서는 하늘과 땅과 그 가운데 모든 것을 그의 말씀으로 다 창조하셨다.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한 것'이라는 말씀은 '땅이 물에서부터 그리고 물로 말미암아 만들어진 것'이라는 말로서 창세기 1:9의 말씀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 거기에 보면, "하나님이 가라사대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둘째로, 베드로는 옛 세상이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음을 상기시킨다. 이것은 노아 시대에 하나님께서 심히 죄악되었던 당시의 온 세상을 홍수로 멸망시킨 사건을 가리킨다. 이것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된 사건이었다. 창세기 6:13, 17,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강포가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내가 홍수를 땅에 일으켜 무릇 생명의 기식 있는 육체를 천하에서 멸절하리니 땅에 있는 자가 다 죽으리라."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말씀하신 그대로 홍수 심판을 세상에 내리셨다. 6절에 '이로 말미암아'라는 원어의 뜻은 '이것들로 말미암아'인데, 여기에 '이것들'이란 '말씀과 물'을 가리킬 1mm 2cm것이다.

베드로는 이제 현재의 하늘과 땅도 하나님의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마지막 심판의 날까지 보존되어 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과거의 역사 가운데 밝히 증거되었던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과 신실함을 깨닫는다면, 미래의 마지막 불 심판의 경고를 믿는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저 불신앙적 선생들은 이 모든 사실을 고의로 잊으려 한다. 저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을 의도적으로 부정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믿는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를 믿자.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을 믿고 그 모든 약속들을 의심치 말자. 특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확신하고 간절히 소망하자.

결론적으로, 1절부터 7절에서 우리는 몇 가지의 분명한 교훈을 얻는다. 첫째로, 우리는 항상 신구약성경을 읽음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또 그 말씀의 능력과 신실함을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게 하려는 것이 베드로가 편지들을 쓴 목적이요 하나님께서 성경책을 우리에게 주신 목적이다. 우리는 성경을 늘 읽음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그 말씀이 우리 속에 풍성히 거하여 은혜 충만한 생활을 하고 또 그 말씀이 다 이루어질 줄 확신하고 소망하고 또 그 말씀을 힘써 행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다.

둘째로, 우리는 말세에 나타나는 불신앙자들의 말에 미혹되지 말아야 한다. 특히 현대 자유주의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과 성육신(成肉身), 그의 속죄와 부활, 그의 재림을 부정하는 무서운 이단 사상이다. 우리는 이런 이단 사상을 배격하고 이런 이단자들을 교회 안에 용납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세계 기독교회는 배교와 타협으로 심히 혼란 중에 처해 있다. 한국에서도 장로교회 중 기장과 예장통합은 자유주의 신학을 포용하고 있으며 감리교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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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드로후서 file blue 2007-10-02 72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