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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라

조회 수 4049 추천 수 0 2007.09.30 08:4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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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라


에스라는 아닥사스다 2세(Artaxerxes II, 405/4-359/8)의 명을 받고 예루살렘에 온다(대략 398 B.C.E.).
성서는 에스라가 아론의 16대 손이라고 전한다(라 7:5). 율법학자요 제사장이었던 에스라는 페르시아 왕으로부터 할 일을 부여받는다.
우선 누구든지 원하면 에스라를 따라 유다로 귀환할 수 있다(7:13).
이것을 보면 모든 포로민들이 유다로 귀환하지는 않았으며 그 숫자도 그리 많지는 않았을 것이다.
삶의 터전이 마련되어 있는 바벨론 땅을 떠나 황폐한 유다로 되돌아가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강제성을 띠지는 않았지만 에스라를 따라 유다로 돌아가면 정치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페르시아 왕의 조치이기도 하다.
이것은 마치 일제가 한반도를 강점하고 일본에 있는 자국인을 한반도에 보내는 것과 비슷하다.
한반도에 들어 온 대가로 그들에게 정치적 특권을 부여하고 한국인을 지배할 권한을 주거나 재정적으로 궁핍하지 않도록 배려했을 것이 뻔하다.

 

에스라는 (자기가 가지고 온 율법에 따라 유다의 민정을 시찰하기 위해) 바벨론에서 모은 재물을 유다로 가져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는다.
그 돈은 예루살렘 성전에 바칠 제물을 유다인의 민정을 시찰하는데 사용되었다.
그 밖에 쓸 일이 있어 자금이 필요하면 페르시아 궁에서 지원하겠다는 왕의 확약이 있다(라 7:14-20).
또한 성전에서 일하는 자들은 조공과 세금이 면제되는 특권을 누렸다.
에스라는 하나님의 율법을 아는 자를 재판관으로 삼고 백성들의 송사를 주관하게 했으며 그들을 가르치는 일까지 일임 받았다(7:21-25).
이쯤되면 에스라는 명실공히 페르시아의 대리통치자임이 분명하다.
그는 율법학자요 제사장으로써 유다 백성을 가르치고 재판하는 일까지 맡아봄으로써 유다사회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보여진다.
페르시아는 에스라를 앞세워 유다에 친페르시아적인 질서를 세우고자 했다.
하지만 그의 공적인 지위는 분명하지 않다. 그는 아마 당시 유다의 총독으로 있던 바고아스와 협력관계를 유지한 것으로 여겨진다.

 

에스라 역시 느헤미야가 그랬던 것처럼 유다인의 잡혼을 철저히 금했다.
그는 느헤미야 보다 한술 더 떠서 이미 이방여인과 결혼하여 살고 있는 경우라도 그 여인을 내쫓고 유다사회로 돌아올 것을 요구한다.
아내뿐만 아니라 이방 여인사이에서 낳은 자식까지 다 내보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전재산을 몰수하고 유다사회에서 내쫓겠다는 것이다(느 9:1-12). 성서는 많은 백성이 에스라의 일에 동조했다고 보도하고 있지만
그렇지 못했던 사람들도 많았을 것이다. 레위인을 비롯한 몇몇 사람들은 에스라의 강압에 정면으로 도전하기도 했다(라 10:15).
인륜은 천륜이라 했던가? 아무리 이방 여인과 함께 사는 것이 야훼의 율법에 거슬린다고 하지만 이미 형성된 가정을 깬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팔레스타인에 남았던 사람들은 사회여건상 유다인끼리만 살수는 없었다. 유다가 멸망한 후 팔레스타인은 이질 종족간의 결혼이 보편화되었고 나름대로의 신앙전통을 형성하며 살고 있었다. 그런데 바벨론에서 돌아온 유다의 지도층들은 자기들이 만든 규정에 의해 남아있는 자들을 심판하고 그 뜻에 따를 것을 강요한 것이다.

 

느헤미야
 
느헤미야는 페르시아의 아닥사스다(Artaxerxes I, 465-424) 왕에 의해 유다로 파견된다.
느헤미야는 대략 B.C.E. 445-430 년 동안 유다에서 활동한 것으로 전해진다.
페르시아의 정치적·재정적인 도움을 받으면서 예루살렘에 도착한 느헤미야는 유다성들의 재건에 착수한다.
페르시아의 정부관리였던 느헤미야는 왕의 총애를 받고 유다 재건에 필요한 물자를 별 어려움 없이 조달 할 수 있었다(느 2:1-10).
그러나 느헤미야의 정책에 반발하는 원주민들의 방해가 있었다.
원주민들을 다스리고 있는 지도층들이 느헤미야의 출현으로 자기들의 권력기반이 흔들릴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이 과정에서 성전재건 대열에 빠진 일부 유다인도 그들과 합세했던 것으로 여겨진다(느 2:19-20; 4:1-14; 6:1-14).
원주민들이 귀환한 유다 지도층에게 불만을 토로한 것은 대체로 이렇다.
자기밭과 집을 저당잡혀 자녀들을 먹일 식량을 마련해야 하고 밭과 포도원을 판 돈으로 세금을 내야한다는 것이다.
자녀들이 종으로 팔려갔지만 그들을 속량할 집 한 채 없다는 것이다(느 5:1-5).
유다의 지도층이 바벨론에 끌려가서 비교적 자유로운 생활을 하고 있는 동안 팔레스타인에 남아있는 사람들은 이렇듯 고충을 겪어야만 했다.
그들은 유다의 총독들에게 과중한 세금부담으로 시달려야 했으며, 폐허된 땅에서 경제활동마저 원할하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포로에서 되돌아온 유다인과의 갈등으로 신분의 계급화가 발생해 원주민들이 노예로 속출하는 사태가 빈번해진 것이다.
페르시아의 정치력을 등에 업고 귀향한 유다인은 원주민과의 동화를 거부하고 그들을 지배하는 새로운 엘리트 계층을 형성한다.
상업자본주의가 성행하고 사유재산제도가 발전하면서 빈부의 격차가 심해지고 계급간의 갈등이 노골화되었다.
이러한 현실을 본 느헤미야는 일대 개혁을 단행한다.
느헤미야는 백성들의 부채를 탕감하여 경제적인 부담을 완화시켰으며,
느헤미야 자신도 한 동안 총독의 녹을 받지 않고 근검한 생활을 했다고 전해진다(5:6-14).

 

느헤미야는 개혁의 일차 조치로 백성들을 제비 뽑아 1/10만 예루살렘에 남기고 나머지 사람들은 다른 지역에 살게 한다.
예루살렘에 거할 수 있는 사람들은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솔로몬의 후손들이었다(느 11:1-36).
이것은 일종의 강제이주 정책으로서 예루살렘을 요새화하고 제국의 통치와 상업적 기반을 확충하기 위한 것이었다.
동시에 예루살렘은 유다인의 종교생활을 위한 새로운 국면을 조성했다.
스룹바벨에 의해 완성된 성전에서 야훼신앙이 회복되었고, 유다인들은 바벨론 포로 이전의 유다전통을 다시 새롭게 확립하고자 했다.
바벨론포로기 동안 팔레스타인에 남았던 사람들의 종교활동이 다른 이방 사람들과 어울려 사는 동안 상당히 변질되었고,
포로에서 돌아온 유다인 역시 포로이전의 상황과 많이 달라졌다.
포로기에 발전된 새로운 형태의 유다교(Judaism)에 익숙한 느헤미야는 안식일 준수를 강조한다.
안식일에는 모든 상업활동을 중단시켰으며 심지어는 안식일에 성문밖에서 기거하는 상인들의 출입까지도 봉쇄했다
(느13:1-22). ?FONT COLOR="#009900">의移潔像?새유다주의는 민족차별주의로 이어지는 배타적 유다주의로 발전한다.
 팔레스타인에 남아 있던 유다인과 이방 여인사이에 낳은 자식들이 유다말을 하지 못한다.
느헤미야는 이들을 비판하고 이방여인과의 결혼을 금한다(느 13:23-27).
이방여인들 때문에 유다인이 하나님께 죄를 짓게 되었다는 느헤미야의 주장은 이전보다도 훨씬 강도 높은 배타적 유다주의를 낳게 한다.
유다 민족주의는 제사장 에스라에 의해 계승되고 팔레스타인에서 새로운 형태의 유다주의가 자리를 잡아간다.

 

에스라-느헤미야(요점)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 나타난 순서:

 

느헤미야가 에스라보다 먼저 도착했고,
에스라가 도착하기 전에 느헤미야는 페르샤 궁전으로 돌아갔으므로 그들은 따로따로 일했다는 가설이 편집사적인 측면에서 주장된다(Gottwald, 201);
 
자료들은 본래 독립적이었다; 세스바살, 스룹바벨, 느헤미야, 에스라가 한 일들은 그 양상이 비슷했기 때문에,
그 일들의 특성을 혼동하고 모호하게 만들 위험성과 특수 전승들을 그들에게 잘못 배정해 줄 수 있는 위험성이 상존했다;

 

편집자는 두 개혁자를 협력자로 보이기 위해 느 8-9장를 에스라 보도로부터 의도적으로 분리시켜 느헤미야 자료안으로 "이식"했을 것이며,
결국 에-느는 현재모습인 E1+N1+E2+N2의 형식으로 차례차례 열거 되었다;
이 결과 율법낭독에는 느헤미야를(느 8:9), 성곽봉헌에는 에스라를(느 12: 26-36)를 삽입시킨 것과 맞물려 있다.

 

에-느의 문학, 사회사적인 의미: 일인칭 구문의 에스라, 느헤미야의 "회고록"이 수록됨;

 

전승 재배열의 융합과정:

 

1)개혁과정에서 종교가 우선이었음을 강조하기 위해 에스라전승을 앞에 배치;
 
2)에스라 개혁의 최종 단계들을 느헤미야의 기록들 사이에 개찬해 놓았을 것이고, 그럼으로써 두 개혁자의 협력을 입증하려고 했을 것이다.

 

역대기, 에-느의 저작의도:

 

모세로부터 다윗을 거쳐 포로기 이후의 재건, 개혁공동체를 잇는 직선을 정확하게 그음으로써,
역대기 사가(CH)는 민족전통과 공동체 관습의 강력한 회복을 정당화하는데,
이것은 페르샤 치하의 식민상태에 대한 적응형태 이면서 동시에 민족적 저항행위의 일환이었다.
그 회복은 유대인들의 종교문화적 정체성을 극도로 엄격하게 규정함으로써 이루어졌고,
따라서 유다의 개혁 지도층에게 완전히 굴복하지 않았던 사마리아인들과 같은 동료 유대인들은 결국 배제될 수 밖에 없었다.

 

역대기 사가의 관심이 역사기술 그 자체보다도 훗날 백성들이 단일민족으로서의 생존과 그들의 본체 및 종교의 보존을 위하여 투쟁할 때,
그들에게 민족적인 긍지를 불어 넣어 주는데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저자는 또한 유대민족과 유대종교는 다른 어느 민족이나 종교에 비해 으뜸이라는 점을 과시하려 하고 있다.
하나님이 예루살렘에 계신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이 목적을 달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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