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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Feb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

작성자: blue IP ADRESS: *.82.181.221 조회 수: 134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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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 1 (Christ Our Life)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골로새서 3:4)
'When Christ, who is our life, shall appear, then shall ye also appear with him in glory' (Colossians 3:4)

이 구절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생명이 창조되는 그 때부터 영광 중에 영원한 생명으로 완성되는 그 때까지
우리의 생명 바로 그것이라는 것을 확실히 하는 경이로운 말씀이다! 그는 태초에 우리의 육신에 생명을 창조하시었다.
그리고 그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 이시다.
이는 그가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기' 위함이다. (사도행전 17:25, 27).
지금 그는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히브리서 1:3) 계시기 때문에,
만약에 그가 한 순간이라도 그 신비로운 결속의 힘을 우리한테서 거두시면,
우리 육신은 원자 한 톨까지도 무너져 내려 흙으로 변할 것이다.
그에게 지으심을 받은 남자와 여자들이, 매일 매일의 명까지도 주시는 바로 그를 거부하고 무시한다는 것은
어찌 어리석다 하지 않겠는가!
물론 정상적인 경우라면 그리스도의 생명유지의 능력에도 불구하고 우리 각 사람은 결국에는 죽어서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다. 생명의 창조주는 생명을 되찾아주시는 분(사실상 한 분뿐인)이시다.
놀라운 진실은 만약에 우리가 그를 믿기만 하면, 그는 우리의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실' 것이다(시편 103:4).
그리만 되면, 우리의 성경말씀이 약속한바 대로 장차 영광된 어느 날 우리는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날 것이다.'

생명의 창조주 (The Creator of Life)

하지만 무엇보다 먼저 우리는 그리스도가 생명의 창조주이심을 인식하는 게 필요하다.
그러나 현대에 사는 우리들 가운데에는 지금까지도 과학자들이 언젠가는 실험실에서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생명을 창조할 수 있을 거라고 간절하게 믿고 있는 사상가들이 있다.
그리고 그들은 소위 '진화' 라는 신비한 힘이 수 10억년 전에 원시대양의 무생물 미분자들로부터 실제로 생명이 창조되었다고 믿고있다.
하지만 그런 믿음은 공상과학소설의 개념이지 실질적인 과학의 개념은 아니다.
심지어 단순히 상상력으로 그려볼 수 있는 수준의 생명조차도
(말하자면 복사 능력이 있는 단백질 분자, 가령 그런 것이 실재한다면 하는 말이지만)
브리태니카 백과사전 전질 속에 포함된 정보보다 더 많은 정보를 프로그램으로 만들어 입력하여야 가능할 것이다.
비록 모든 과학지식과 값비싼 실험기구들을 총동원하고서도 생명을 창출한 과학자는 일찍이 없었다.
(실질적으로 그런 기도를 하였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므로 어딘지도 알려지지 않은 어느 바다에서 오래 오래 전에 무심한 화학성분들이 우연히 생명을 창조하였다고 가정하는 것은
너무도 순진한 생각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일단 생명이 존재하게 된 후에 각기 생명의 종류를 종류별로 재번식하는 경이로운 유전인자 암호체계의 기원을 설명하는 것조차도
지금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John Maddox 경(아마도 최근까지 가장 유명한 과학 잡지의 편집인으로 있었던)은 이렇게 인정하였다.

'유전인자 암호체계는 생명의 기원 그 자체가 아직도 모호한 것에 못지 않게 모호하다는 것은
실망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Nature, January 13. 1994, p.111).

모든 과학적인 증거들은 하나같이 생명은 자연주의적으로 생산되는 게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생명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반하나님적인 억지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성경의 제일 첫 번째 장은 '하나님이 모든 생물을 … 창조하시었음'을 확인하고 있다 (창세기 1:21).
히브리어(이 절에서는 '생물; creature로 번역 됨)는 nephesh 인바, 이 단어는 그냥 '생명'이라고 자주 번역된다.
이와 같이 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든 개개의 생명을 창조하셨다는 성경의 기록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분명하게 들을 수 있는 것이다.
특히 그는 인간의 생명을 창조하셨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창세기 2:7).
바로 이 핵심 절에서 히브리 단어 nephesh가 '생령; soul'로 번역되어 있다.
이 두 경우 어느 쪽에서도 하나님이 생명을 창조하였다는 것은 명백하다.
이 생명의 신성한 창조주는 실질적으로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그리스도,
즉 육화이전의 존재이시던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골로새서 1:16에 강조되어있다.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이 말씀과 비슷하게 에베소서 3:9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만물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창조하셨다 … '고 하고 있다.
그리고 히브리서 1:2은 하나님이 '모든 세계를 지으신 것은 하나님의 아들로 말미암았다' 라고 말하고 있다.

이 위대한 진리를 가장 명백하게 진술한 대목은 요한복음에 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복음 1:1-4; 14).
그와 같은 명명백백한 계시의 말씀의 관점에서 우리는 삼위일체 보좌의 두 번째 인격이시며,
영원히 살아 계실 아버지의 독생자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생명을 창조하셨으며,
특히 이 지구 위에서 생을 영위하고 있는 우리들 자신의 개인적인 삶의 창조주이심을 의심 없이 인식할 필요가 있다.

영적 생명과 죽음 (Spiritual Life and Death)

그런데 육신의 생명만이 살아있는 생명이 아니다! 아담은 하나님께서 그를 지으실 때엔 '생령'으로 만들어졌다.
뿐만 아니라 그와 하와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던 것이다 (창세기 1:27).
이것은 그들이 육신과 마음(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그리스도라는 육신을 입고 스스로가 인간이 되었을 때와 마찬가지로)을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은 창조주와의 교감을 지속하는 영원한 친교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이와 같이 해서 인간의 생명은 '영과 혼과 몸의' (데살로니가전서 5:23) 생명이다.
그런데 문제는 아담이 이 세상에 죄악을 가져다주고 창조주와의 친교관계도 단절되어 버리자
인간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 치명적으로 훼손되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불순종의 결과는 죽음이라고 경고하였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창세기 2:17).
그럼에도 그가 그 금단의 열매를 먹었을 때, 하나님은 아담에게,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창세기 3:17, 19) 하셨다.
하나님이 경고하신바 대로 아담의 영적 생명은 그가 죄를 짓고 자기를 지은 자와의 관계를 단절하자마자 죽게 되었다.
동시에 부패와 죽음의 물리적 메커니즘이 그의 육신에서 작동하기 시작하여
끝내는 930년 후에 실질적인 육신의 죽음을 맞게 되었던 것이다. (창세기 5:5).
하지만 생명이 죽은 것은 아담뿐만이 아니었다.
'아담 안에서 모든 것이 죽은 것 같이… '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고린도전서 15:22; 로마서 5:12).
이것은 마치 아이들이 정신적 육체적 성질을 부모와 조부모로부터 유전적 유산으로 물려받는 것과 같이
아담과 하와에까지 소급하여 물려받게 됨으로써, 그들은 아담과 하와의 원천적 범죄의 경향까지 물려받았다.
그 범죄의 경향은 육신의 부패와 죽음으로 지향되는 유전학적으로 선천적인 경향이다. 이것은 결국 죄의 결과인 것이다.
심지어 사도 바울과 같이 믿음이 돈독한 사람까지도 자기 자신이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도다,' 하고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로마서 7:23, 24) 하고 부르짖었다.
비록 청순 무구한 마리아까지도 역시 구세주(하나님 내 구주(누가복음 1:47))가 필요하다는 것을 시인하였다.

그러므로 우리 영의 본성에 관한한, 우리는 모두 죄인으로 태어났다,
'너희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 우리도 …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에베소서 2:1, 3).
그렇지만 창조주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를 죽음의 육신으로부터 구속하실 수 있는 분이신, 한 구주께서 우리한테로 와 계시는 것이다.
그 분은 우리를 창조하신 바로 그 하나님이시다   ━ 그러기에 그는 우리를 구속하실 수 있으시다!

생명의 구속자 (The Redeemer of Life)

그이 말고는 따로 구속자는 없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로마서 6:23), 그런데도 사람은 모두 죄인이라 함은 그들이 하나같이 천성과 관습에서 아담의 후손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의 영혼은 고사하고 어느 누구도 ' … 자기 영혼을 살리지 못할 자도다 …'(시편 22:29).

오로지 하나님만이 생명을 창조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 한 분만이 생명을 구속하시고 살리실 수 있다.
창조주는 또한 바로 그 구속자임이 틀림없다.
왜 그런가 하면, 세상에 우리를 죄에서 건지는 사역을 완성할 능력을 가진 자는 하나님 말고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당신 스스로에 모순될 수 없다. 다시 말해서 당신 스스로의 거룩하심의 기준을 양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는 그의 기준에 반대되는 모든 인간의 보편적 거부를 그냥 못 본 체 지나칠 수 없는 것이다.
절대 의로운 창조주와 인간과의 사이에 인간의 죄로 인해서 생긴 끝을 알 수 없는 심연(深淵)은
단순히 인간의 노력만으로 제거될 수도 다리를 놓을 수도 없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당연히 전지전능하시기 때문에 당신의 창조사역의 목적을 못 이룰 리 없다.
그는 아담에 의해서 죄와 죽음이 이 세상에 들어오기 전부터 타락할 인간의 구속을 위한 장엄한 계획을 세우셨다.
하나님의 '어린 양'은 '창세 이후로부터' '세상 죄를 지고 가실 어린 양'이 되어 (요한계시록 13:8, 요한복음 1:29),
온전하게 거룩하고 죄 없는 제물로 봉헌될 운명으로 미리 정해졌던 것이다.
제물이 될 흠없는 양은 두말할 여지없이 어느 누구도 아닌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고린도후서 5:19, 21).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을 그토록 아름답게 간증하는 그런 경이로운 교류(交流)는
인간의 발상(發想)으로서는 결코 창출될 수 없었다.
그리고 이 사실은 그런 사랑의 원천은 하나님 당신 자신의 마음속에 있다는 것을 극명하게 나타낸다.
자기 자신과 영원한 친교관계에 있게 하기 위하여 우리를 당신 자신의 형상대로 지으신 창조주이시기에
우리의 죄에 대한 정당한 정죄로부터 우리를 구속하기 위하여 우리의 죄 값을 당신 자신이 치르셨다.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면, 우리의 죄로 인해서 우리는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과 영원히 갈라섰을 것이다.
오로지 우리의 창조주 하나님 (즉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구주가 되실 수 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사도행전 4:12).
영원하신 하나님의 독생자만이 온전하고 죄 없는 인간(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바랄 수 있는 인간)이 되어야만 하였다.
그렇게 해서 모든 인간을 대신하여 온 세상의 죄로 인하여 정죄된 죽음의 고통을 짊어질 자격을 스스로에게 부여하였던 것이다.

과연, 우리 창조주는 우리의 구주가 되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는다면, 그는 창조사역에 대한 그의 목적을 실패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일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는 사랑하는 당신의 권속들을 당신과 영원히 갈려 지내게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그렇게 된다면 그들을 창조하실 때 그들에게 걸었던 그의 목적은 실패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창조주께서는 반드시 구속자가 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오직 구속자만이 창조주가 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구속의 대가는 죽음이다.
그래서 생명의 창조주는 반드시 죽어야만 하였다! 그러나 그는 영원히 죽어 있을 수 없었다.
그가 영원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생명의 창조주의 부활 (The Resurrection of Life's Creator)

이와 같은 신성(神性)의 역설에 대한 해답은 이렇다.
즉, 그리스도 안의 하나님은 '끝없이' 죽어야하지만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역설이다.
그는 그 자신의 죄 없는 몸으로는 모든 시공 속에 있는 모든 인간의 모든 육적인 죄의 무한한 무게를,
그리고 그 자신의 죄 없는 정신으로는 모든 곳에 사는 모든 사람들의 모든 혼적인 죄를,
그리고 그 자신의 온전한 영혼으로는 모든 인류의 모든 영적인 죄를 감당하여야만 한다.
그러므로 그는 십자가에 매달려서 하나님 아버지와 완전히 헤어져 있던 그 무서운 세 시간 동안
끝없는 지옥의 고통, 그 자체 속에 있었다.
그런 다음 그 십자가형의 무시무시한 육체적 심정적 고통은 말할 것도 없이 아버지로부터 떠남으로 겪는
끝없는 영적 죽음이라는 고통을 '다 이룬' (요한복음 19:30) 후에야 그의 몸은 온전히 죽었던 것이다.
그 다음에 그의 영혼(물론 그의 영혼은 존재를 멈춘다는 뜻으로의 '죽음'을 죽지 않는다)이 떠나 명부(冥府; Hades)로 가서
거기에 영어(囹圄)의 신세에 있는 영들에게 죄와 죽음을 이긴 그의 승리를 선포하는 한편,
그의 시신은 무덤 속에 사흘 동안 안치된 채로 있었다 (베드로전서 3:18-20).
그런 다음에 위대한 부활의 기적을 이루셨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은 영적부활일 뿐이라고 주장하기 일쑤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잘못되었다. 그의 영혼은 그의 아버지를 떠났던 그 무서운 시간을 제외하고는 결코 죽지 않았었다.
그러므로 그의 영혼의 부활이라는 말은 가당치도 않다!
심지어 그리스도의 제자들까지도 십자가형 이후 처음 그가 나타나자 그들이 '혼령'을 보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는,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줄 알라 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누가복음 24:39) 하며 당장에 그들의 오해를 바로잡았다.
4복음서는 모두 한결같이 주 예수의 죽음뿐만 아니라, 매장까지도 기술하고 있다.
 더욱이 그의 구속복음의 핵심(고린도전서 15:1-4에서 개설(槪說)되어 있는 바와 같이)은
그의 매장을 기정사실로 믿고 있었다는 점이 드러나고 있다.
복음서 저자들은 하나같이 사람들은 예수의 부활이 영혼의 부활뿐만 아니라,
육신의 부활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인식했다.
그는 몸으로 죽어 아담의 죄에 대한 심판이 영혼의 죽음뿐만 아니라, 육신의 죽음을 뜻하였다는 것을 확인시켰다.

우리의 생명은 몸과 영과 그리고 혼을 포함하고 있으며,
또한 생명의 이 세 구성요소 모두가 하나님의 위대한 구속과 보전 사역의 대상이다 (데살로니가전서 5:23).
일단 그리스도가 십자가 위에서 세 시간 동안 그의 아버지로부터의 무서운 별리의 고통을 당한 후 (마태복음 27:46),
그리고 그가 그의 몸을 떠나 무덤 속에서 사흘 동안 '잠'을 잠으로써 죄에 대한 빚을 온전히 갚고,
사탄과 죄와 그리고 사망을 당당하게 이기고, 몸과 영과 혼으로 사망에서 일어나셨다.
베드로가 오순절 날에 행하였던 그의 위대한 설교 중에서 선포한
' …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어 있을 수 없었음이라' (사도행전 2:24)고 한 내용이 바로 그것을 일컫는다.
다시 말해서 사망은 그를 잡아매지 못한다.
하나님은 우리 죄의 용서와 구속을 위한 엄청난 대가를 치르는 한 순간을 제외하고는 현실적으로 영원히 죽을 수 없다.
일단 그 값을 치른 다음에 그는 무덤 속에 누인 그의 몸으로 돌아와 수의(壽衣)를 벗어놓고 무덤을 나서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사십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셨다 … '(사도행전 1:3),
그런 다음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리우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마가복음 16:19).
전체 책들(그 중 많은 책들)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신성(神性)을 간증하는 '수많은 확실한 증거들'에 관해서 기록하고 있다.
전 세계 방방곡곡에서 오랫동안 지속되어오는 기독교 교회의 존재는 그 자체로서도 분명한 증거다.
왜 그런가 하면, 교회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신성의 증거가 없었다면 탄생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타의 종교들은 제각기 창시자의 가르침 위에 근거하고 있지만 기독교는 그렇지 않다.

포스트-사도 시기의 언필칭 교회의 아버지들의 기록에서는 물론, 사도행전에 있는 초기교회에 관한 기록에서도
이 사실은 아주 극명하게 드러나 있다.
위대한 그리스도의 가르침도 그 때에는 그의 체포와 사형집행으로 귀착됐을 뿐이다.
초기 그리스도교도들을 확신을 갖게 하고 용기를 북돋운 동기는 그가 무덤에서부터 몸이 살아난 놀라운 부활이었다.
무시무시한 핍박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리스도를 그리고 그의 구속(救贖)을 집요하게 전도하였다.
그들은 그가 항상 살아 계시리란 것을 의심 없이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럴 수 있었다.
그렇다면 최초의 제자들로 하여금 그렇게도 확신을 갖게 하였던 틀림없는 증거는 무엇이었을까?
제일 첫 번째 증거는 바로 그 빈 무덤이었다.

제자들 모두는 그가 요셉의 무덤에 매장되었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었다.
그것은 십자가에서 죽어가는 그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여자들도 역시 요셉과 니고데모가
그를 무덤에 안치하는 것을 보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여자들이 그 주(週) 첫 날 아침 일찍이 바로 그 무덤에 다시 찾아왔을 때
무덤 입구를 막고 있던 묵중한 돌이 치워져 있었고, 무덤을 지켜야할 파수 군인들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찬란한 옷을 걸친 두 천사 (누가복음 24:4)가 나타나서 예수님이 죽음에서 일어나서 무덤을 떠났다고 단언하였다.
막달라 마리아가 이 말을 베드로와 요한에게 전하려 달려갔다
(아마도 요한이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를 돌보고 있었던 것 같다━요한복음 20:4-8).
그러자 베드로와 요한도 역시 무덤으로 달려와서 직접 무덤 안으로 들어갔다. 요한의 감동적인 진술은 이렇다.
둘이 같이 달음질하더니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아나서 먼저 무덤에 이르러/
구푸려 세마포 놓인 것을 보았으나 들어가지는 아니하였더니/ 시몬 베드로도 따라 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개켜있더라/
그 때에야 무덤에 먼저 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 (요한복음 20:4-8).
이와 같이 해서 요한은 세마포 수의와 머리수건이 본래 있던 자리에 그대로 있으면서도 안으로 폭삭 꺼져있는 것으로 보아
예수의 부활된 몸이 수의와 두건을 벗어놓고 빠져나간 것 말고 다른 설명이 있을 수 없다고 당장에 인식하였다.
요한은 그렇게 믿었다!
무덤이 비어 있었다는 사실은 오늘날까지도 그리스도의 몸의 부활을 흔들림 없이 증거 한다.
그러나 그것만 전부가 아니다. 제자들은 실제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보고, 하시는 말씀을 듣고,
몸을 만져보고, 또 함께 음식을 먹음으로써 더욱 더 확신하게 되었다.
그는 '…사십 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셨다' (사도행전 1:3).
비록 오늘날 우리가 그들처럼 그를 보지는 못하지만 그들의 간증은 확고부동하여 가히 설득력이 있다.
여러 해가 지난 후에 사도 바울은 그를 직접 보았던 자들 중 몇몇의 증언을 상세히 설명한 적이 있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죽으시고/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 있고 어떤 이는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 (사도행전 15:3-8).

바울은 그의 제일 처음 보이심(막달라 마리아에게)과, 맨 마지막으로 보이신 (밧모에서 요한에게) 일을,
또한 엠마오로 가는 노상에서 두 제자에게 보이신 일과, 그 밖에 불특정 다수에게 보이신 일들을 일일이 언급하지 않았다.
그가 거명한 사람들(특히 그를 보았던 500여명 중에 아직도 살고 있던 사람들)은 보통이라면
대개는 그가 잘못 알고 하는 소리라고 비난했음 직하다.
그것은 특히 그들은 그들의 신앙으로 인해서 핍박받고 있었으며, 그들의 목격담을 취소하라는 압박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를 비난하지 않았던 것이다!
예수의 나타나심은 개인들에게, 일부는 집단에게, 어떤 때는 밀폐된 실내에서,
그리고 다른 때에는 열린 노상이나 언덕 위에서 있었다. 그 많은 나타나심이 결코 환영일 수는 없다.
왜 그런가 하면, 환영은 이 모든 나타남과 같이 그렇게 다양한 환경에서 나타날 수 없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 많은 목격자들이 다 공범자일 수는 없었다.
왜 그런가 하면 그들은 자기네의 간증으로 인해서 모두가 다 고통을 받고 있었으면 있었지 결코 이득을 본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실제로 목격하였으며,
또 빈 무덤을 보았기에 그의 부활을 절대적으로 확신하고 있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따라서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 (사도행전 4:33).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부활 생명 (Our Resurrection Life in Christ)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망으로부터 우리를 구속하기 위해서 당신의 생명으로 그 값을 치르시고,
우리의 죄에 대한 징벌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고, 영광스런 부활의 몸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온전히 만족하시었다는 것을,
그리고 우리는 온전히 구속되었다는 것을 확실히 알려주셨다. 그리고 그는 그를 믿는 우리도 모두 다 부활할 것임을,
그리고 그와 같이 부활의 몸으로 영광 받을 것임을 약속하셨다.
그는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빌립보서 3:21).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고린도전서 15:42).
하지만 이 변화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려야만 가능하다.
그 때가 되면 모든 신실한 신자(죽은 자 산 자 구별 없이)들은 부활하여 영광의 몸으로 변화할 것이다.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요한복음 14:19) 라고 그는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한편 이 현재적인 생명은 도덕적인 죄와 종교적인 죄로 말미암아 영적으로 죽은 사람이기에 더 이상 살 수 없다.
만약에 우리가 그를 믿는 신앙 속에서 그분 앞에 진정으로 나와서 구속이 필요한 길 잃은 죄인으로서의 우리 신세를 고백한다면,
그리고 죽음으로 정죄된 우리의 죄를 그가 대속하신 것을 믿는다면, 그리고 또한 그의 부활과 우리의 주님으로서 그의 권위를 믿는다면,
그 때에 가서야만 사실상 우리는 새 생명으로 거듭나게 되는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로마서 6:9-14).

비록 아직은 우리가 우리의 옛 몸 안에 있지만,
우리들의 일상의 삶은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새 생명에 걸맞은 태도로 살아야만 한다는 명제가 분명해진다.
우리는 그의 재림에 맞추어 이 낡은 몸이 곧 부활하여 그리스도의 몸과 같이 영광에 싸일 것이라는,
즉 ' …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로마서 8:29) 라는 그의 확실한 언약을 받아들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으로서는 우리 모두는 그와 같은 약속된 영광의 미래에 어울리게 살아야만 한다.

성경에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우리의 새 생명에 관한 놀라운 증언들과 약속의 말씀들이 수없이 많다
하도 많아 여기서 그 모든 말씀을 일일이 거명할 수 없을 정도다. 하지만 몇 말씀만 주목하기로 하자.
바울이 말하기를,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라디아서 2:20).
사실상 하나님은 우리를 이미 부활하시어 영광 중에 그와 함께 있는 '그리스도 안에서'만 우리를 바라보시는 것이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에베소서 2:5,6)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시는 그리스도와 함께 자리를 하고 있을
우리(이미 우리가 그 곳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확실한 약속 안에서)를 생각할 때,
우리는 이 지구 위에서 살고 있는 동안은,
그리스도께서 이 곳에 아직도 계신다면 그가 사셨을 삶과 같은 삶을 하루하루 살아가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리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골로새서 3:1-3).

영원한 생명 (Everlasting Life)

위에 인용된 절(골로새서 3:1-3) 바로 다음 절은 이 글의 주제인 골로새서 3:4 이다.
그런데 이 절은 얼마나 영광스러운 말씀인가!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지금 우리는 '위치상으로는'아버지의 우편에 계시는'그리스도 안에서'그와 함께 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가 이 지구에 다시 한번 '나타나실' 때에는 그의 인격 속에서 그와 함께 우리도 나타날 것이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요한일서 3:2).

이 말씀은 그의 약속인즉 그는 약속을 식언할 수 없으시는 이다.
' …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한복음 14:3)고 그는 말씀하셨다.
영광에 싸인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된 생명처럼, 약속받은 우리의 부활된 생명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의 '양'에 관해서, 그는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한복음 10:28) 라고 약속하신다. 
다시 말해서 주 예수를 우리의 구주로 믿는 우리는, 믿는 그 순간부터 이미 영생을 가졌음을 뜻한다.
사도 요한은 우리한테 이렇게 확언해 준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요한일서 5:13).
이 생명이 영원하다는 말씀을 주목하라! 이 말씀은 어느 누구도 이 생명을 빼앗을 수 없음을 뜻한다.
왜 그런가 하면, 만약에 그들이 이 생명을 빼앗을 수 있다면, 그 생명은 영원한 생명이 아니기 때문이다.
믿음의 크리스천이 몸으로 죽었을 때에, 그의 시신은 한 동안 무덤 안에 머물 것이다.
그러나 그의 몸 안에 있는 영과 혼은 그 잠시 동안 하늘로 올라갈 것이다.
그곳에서 그는 (혹은 그 여자는) 주님과 함께 거할 것이다.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고린도후서 5:8). 그는 또 다른 서간문에서
'내가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빌립보 1:23) 라고 떠나기를 원하고
떠날 준비가 되어있음을 말한 적도 있다.

하지만 몸을 떠난 영혼이 천국에서 존재하는 때는,
그 어떤 멈춰진 활력의 '혼-수(魂-睡)(몸을 떠난 영혼들이 서로를 볼 수도 없고 교통할 수도 없는}상태로 있는
무의식의 시간이 결코 아닐 것이다.  그런 상태의 영혼의 존재를 결코'더 좋다'할 수는 없다.
명부(冥府)에 들어간 어느 부자와 나사로(Lazarus)의 영혼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예수는 천국에서의 영혼의 존재가 그렇지 않다(누가복음 16:19-31)는 것을 확실히 하셨다.
물론 '아버지 아브람'과 '나사로'는 아직은 '그리스도와 함께' 있던 게 아니었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아직은 죽지 않았기에 그들을 '낙원'(누가복음 23:43)으로 함께 들어가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들은 죽은 후에 천국에서 의식할 수도 있었고 또 서로 교통할 수도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재림 이전에 천국에서 살고 있는 기간 동안 그 어떤 인식하는 영적인 몸을 확실히 지니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지구에서 알고 있는 것보다 더 적게 천국에서의 일을 모를 수는 없다.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린도전서 13:12).
이와 같이 해서 ' …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빌립보서 1:21).

그러나 이 단계의 미래 생명은 단지 한시적이다.
그리스도께서 나라들을 심판하고 그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 지구로 돌아오실 시간이 되면,
구속되어 천국에 머물던 모든 남자와 여자는 그를 따를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데살로니가전서 3:13).

그 때에 위대한 부활의 날이 열린다!
성도들의 영적 몸들은 그 어떤 위대한 기적적인 교류(交流)를 통해서
그들의 죽은 몸으로 돌아와 그들의 주와 같이 변모하고 영광을 입을 것이다. 
주님은 하나님의 나팔 소리에 맞추어 대천사의 목소리로 큰 한 소리 외치면서 하늘에서 강림하실 것이다.
그리 되면 제일 먼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일어날 것이다.
그 다음으로 살아서 남아있던 우리들이 그들과 함께 구름에 휩싸여 하늘로 올라가 주님을 만날 것이다.
그리 되어 우리는 영원히 주님과 함께 있을 것이다.(데살로니가서 4:16, 17)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고린도전서 15:51, 52).
그리스도께서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에베소서 1:14)는 구속사역을 완성하기 위해 최종적으로 오실 때에
성경에서 예언된 천국과 지구에서 일어날 일들은 이 책자가 다루기에는 범위가 너무 넓다.
지금으로서는 그 영광된 부활의 날에 일어날 위대한 일들 중 제일 먼저 어느 순간에라도
그가 오실 수 있다는 말씀을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리고 그의 오시는 순간을 위해 우리는 언제나 준비를 갖추고 있어야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 (마태복음 25:13).
성경은 그의 강림이 가까워졌다는 흔적을 수없이 우리에게 일러주었다. 그러나 그의 강림에 앞서 일어날 일에 대한 언급은 없다.
만약에 그런 것이 언급되어 있다면, 우리는 그를 기다리지는 않고 오히려 그런 일이 일어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우리가 그를 기다리기를 원하신다. 그 어떤 반-그리스도나, 어떤 고난을 기다리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
다시 말해서 그 말고 다른 어떤 것도 기다리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히브리서 9:28)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빈번히 일어나는 일이지만 큰 어려움에 봉착할 때면
사람들은 그가 오셔서 그 어려움에서 그들을 건져주실 것을 기대하는 데 그것은 오히려 당연하다고 하겠다.
하지만 우리가 그의 오심을 기다리는 주된 동기는 그런 것이어서는 안 된다.
그러기보다는 우리는 그가 그의 제자들에게 오래전에 가르쳐준 기도의 말씀대로
그의'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마태복음 6:10)를 원하여야 한다.
그의 오심과 연관되어 여기 이 지구 위에 그의 온전한 나라가 서고 결국 창조에 담긴 그의 영광스러운 목적이 모두 이루어질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오심을 바라고 또 기다리는 것이다.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 니라' (디모데후서 4:8).
그의 영생의 선물을 받은 모든 사람들에게는 앞으로 세세토록 진정으로 놀라운 시간이 마련되어 있을 것이다.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요한계시록 21:3,4).
그 때가 바로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요한계시록 14:13) 쉬는 시간이다.
그러나 그 때는 또한 주님이 구속하신 피조물들 안에서 주님을 위한 봉사가 영광되고 만족스러운 것이 되는 시간이다.
'다시 저주가 없으며 …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 (요한계시록 22:3),
그것은 그들이 영원히'…주님의 즐거움에 참예할'(마태복음 25:21, 23)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생명을 창조하시고 우리의 생명을 보전하시며 우리의 생명을 죄와 사망에서 건지시기 위해 죽으셨다가
다시 부활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는 이 모든 일을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히브리서 12:2) 행하셨다.
그래서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에베소서 2:7).

한편 우리가 그의 오심을 기대에 찬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동안,
그는 우리들에게 여기 이 지구에서 '…내가 돌아오기까지 장사하라 …'(누가복음 19:13)
그리고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로마서 12: 11)하고 일러주셨다.
그리고 우리가 '그를 기다리며' 또 '그의 나타나심을 갈망하는' 동안,
우리가 '그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바 되면 그의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요한일서 2:28) 하는데 있다.

우리는 매일같이 사랑의 마음으로 이런 것을 되뇌어야 한다. 즉,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골로새서 3:4)

끝으로, 그를 구속의 주로 영원한 생명의 주로 믿지 않는 사람에게 주님은 마지막 초대의 말씀을 보냈다.
즉,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 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요한계시록 22:17).
누구든지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자기의 개인적인 구주로, 주님으로 영접하는 자는,
즉 그의 영적인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한복음 4:14) 하셨다.


출처 : IC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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