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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 전직목사 짐 베이커사건

조회 수 23138 추천 수 0 2009.12.09 11:4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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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 전직목사 짐 베이커사건


역사를 아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역사를 통해서 교훈을 얻어서 좋은 점은 본받고 나쁜 점을 배격해 나갈 수 있습니다.
성경은 너무나 정확한 하나님의 말씀이자 정확한 역사의 보여주고 있습니다. .

다음 내용은 1980년대부터 1990년대 초에 미국을 떠들석 하게 만들었던 짐 베이커목사부부의 엽기적인 행각을 심층취재한 글입니다.
짐베이커목사는 엽기적인 행각이 드러날 떄까지 그의 입에는 끊임없이 "나는 기름부음받은 종이다. 죄없는 자가 돌을 쳐라" 는
성경을 들고서 망아지처럼 날뛰었습니다.

목사 짐 베이커의 최후는 동성연애와 간통과 성폭행의 의혹속에서 공금횡령으로 8년간의 감옥살이 하였으며,
감옥살이 중에 아내는 친구의 여자가 되었고, 지금은 "I was wrong" 이라는 고백서로 회개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읽어보시고 "목사" 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얼마나 괴상망칙한 짓들을 할 수 있는지를 보시기를 바랍니다.
제발 정신을 차리시고 지나간 역사의 반복을 교훈으로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속에 있는 "목사우상"과  "건물성전 건축미신" 에서 깨어나야  우리가  살아날 수 있습니다.
****************************************************************************************************************

유명목사 짐 베이커사건을 보면 성전 건물건축에 사로잡힌 중부교회사태, 갈보리교회사태, 뉴욕장로교회사태가 보입니다
짐 베이커 사건의 회상 짐 베이커(Jim Bakker)와 테이미 베이커(Tammy Faye Bakker) 부부가 무대 위에 나타나면 사람들은 열광했다.
짐 베이커 목사의 몸짓 하나 하나에 사람들은 울고 웃었다.

그는 무대위를 뛰어다니며 소리쳤다. "하나님을 찬양하십시오. 하나님을 찬양하십시오.
학식 있고, 교양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았을 때,
하나님께서는 미시간 시골동네의 촌뜨기 짐 베이커를 일으켜 세워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십시오."
정신없이 무대 위를 뛰어 다니는 짐 베이커 목사를 쫓아다니며 그의 보조 진행자는 부채질을 했다.

다소 웃기는 장면이었지만 그의 과장된 쇼를 보는 사람들은 모두 즐거웠다. 그리고 그 웃음 속에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역사하고 계신 것 같았다.
헌금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는 정말 진지했다. 그의 설교를 듣다 보면, 사람들은 누구나 절박함을 느꼈다.
당장 10불, 100불의 헌금을 보내지 않으면, 수없이 많은 영혼들이 죽어갈 것만 같았다.
돈을 (보)내지 않으면 사탄의 제국이 당장 미국을 집어삼킬 것처럼 느껴졌다.

매일 프로그램이 끝날 때면, 베이커는 카메라를 따뜻하게 바라보며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정말 사랑하십니다(God loves you. He really does.)"라고 말했다.
사람들은 그의 한 마디 한 마디에 위로를 느꼈다. 그는 사람들에게 세계선교의 비전을 주었고, 그 비전의 성취를 위해 엄청난 헌금을 걷어들였다.
그가 이끄는 PTL(Praise the Lord의 약자) 선교방송은 최소한 60만 명의 후원자를 가 지고 있었고, 연간 헌금액은 무려 1억 2천만 불에 달했다.
우리 돈으로 치면 1천 500억 원에 달하는 엄청난 금액을 매년 걷어들인 셈이다.

짐과 테이미 부부는 일반 방송의 각종 프로 그램에도 출연했고, 각종 잡지의 표지를 장식했다.
뉴스 쇼 뿐만 아니라 자니 카슨 쇼 같은 유명한 프로그램에도 얼굴을 내밀었다.
짐 베이커 목사 부부는 복음전파를 위해 텔레비전을 가장 효과적으로 이용했던 TV 복음 전도자(television과 evangelist를 결합하여
보통 televangelist라고 부른다)였다. 적어도 1987년 봄까지는 그랬다.

짐 베이커는 1940년 미국 미시간 주 머스케튼에서 가난한 기계공 라레이 베이커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전통적으로 근본주의적 오순절파에 속해 있었다. 짐 베이커의 극적인 회심은 1956년 12월 16일 저녁에 찾아왔다.
교회를 빠져먹고 아버지의 캐딜락 승용차에 여 자친구를 태운 뒤, 록큰롤을 크게 틀어놓은 채 함께 놀러나가던 중,
도로에서 3살 먹은 지미 서머필드라는 소년을 치게 된 것이다.

소년을 친 후, 짐 베이커는 소년이 죽었고 자신은 감 옥에 갈 것이라는 극도의 공포감에 쌓이게 된다.
그러나, 다행히 소년은 곧 회복되었고, 짐 베이커가 감옥으로 가지도 않는다.
짐 베이커 자신의 표현에 따르면, 이 사건을 계기로 그는 평생을 하나님 앞에 헌신하게 되었으며, 이 날 이후 오직 예수님만이 그의 관심사가 되었다 고 한다.

그러나, 여기서 "짐 베이커의 표현에 따르면"이라는 말을 덧붙인 것에는 까닭이 있다.
짐의 주장과는 달리 주변 여러 사람들은, 사고 당일 짐은 저녁예배에 출석한 후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고, 여자친구와 함께 있지도 않았으며,
사고 이후 별다른 생활의 변화도 없 었다고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고등학교를 졸업한 짐 베이커는 노스 센트럴 성경 대학에 진학하고, 그곳에서 테이미 페이어를 만나게 된다.
짐 베이커의 아내가 된 테이미 역시 어린 시절부터 근본주의적인 오순절파 가정에서 자라났 다.
그녀의 집안도 짐 베이커 못지 않게 가난해서, 영하 40도를 오르내리는 날씨 속에서, 8 명의 자녀가 옥외변소를 사용해야 할만큼 심각한 지경이었다.
그녀의 유년시절, 근본주의적 오순절파는 여성의 화장이나 액세서리를 일체 금지했고, 이혼한 사람을 회중으로 받아들이 지 않았다.
불행히도 테이미의 어머니는 이혼을 했고, 그런 까닭에 테이미는 10세에 방언을 하는 등 이른바 성령체험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 공동체에 완전히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런 그녀의 경험은 훗날 그녀가 진한 마스카라 화장으로 인해 "마스카라 공장"으로까지 불 리게 되는 원인을 제공하게 된다.

1965년 짐과 테이미 부부는 패트 로버트슨 목사가 운영하는 CBN (Christian Broadcating Network) 방송에 취직한다.
이미 어린이들 대상의 인형극 순회공연으로 명성을 쌓고 있던 이들 젊은 부부를 CBN의 한 프로듀서가 주목하게 된 결과였다.

지금은 CBN이 미국에서 가장 탄탄한 기독교 방송으로 자리잡고 있지만 당시만 해도 아직 규모가 변변치 않던 시절 이었다.
이 작은 방송국에서 짐 베이커 부부는 어린이 프로를 맡아 진행했다.
세속적인 오락 프로그램들을 모방한 인형극의 성공을 바탕으로, 짐 베이커는 패트 로버트슨에게 자니 카슨 쇼와 같은 심야대담프로를 신설할 것을 제안한다.
 이것이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700 클럽"의 시작이었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짐 베이커는 전국적 명성을 얻게된다.
상원의원의 아들이었고, 법과대학원 졸업생이었던 패트 로버트슨 목사가 식자층을 대상으로 한 철학적 이고, 심도 깊은 화법을 구사한데 반해,
짐 베이커 목사는 가난뱅이 집안 출신의 성경대학 졸업생답게 쉽고 친근한 화법으로 사람들의 곁으로 다가갔다.

당시 질병을 치료하고, 기적을 행하던 캐더린 쿨만 여사를 "700 클럽"에 초대한 짐 베이커는 이후 TV를 통해 캐더린 쿨만 을 흉내내기 시작한다.
그리고, 실제로 짐 베이커의 프로그램을 보던 중에 병이 나았다는 사 람들도 나타난다.

짐 베이커의 초기 사역을 기억하는 많은 사람들은 적어도 그 당시에는 짐 베이커가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을 받았다고 믿고 있다.
같은 시기에 짐 베이커는 헌금을 모 으는데 있어서도 천부적인 재능을 발휘했다.
전화로 헌금을 받는 자원봉사자들 옆에 서서 베이커는 외쳤다. "전화 벨이 한 번 울릴 때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축복하십니다.
할렐루 야!" 이처럼 명성을 쌓아감에 따라 짐 베이커와 테이미 베이커 부부는 서서히 독립할 길을 모색 한다.

CBN이 아닌 다른 프로듀서를 통해 자신들의 이름을 내건 찬양집을 내기도 하고, 인 형을 판매하기도 하고,
어린이용 그림책을 발간하기도 하면서 돈 맛을 알아가게 되는 것이다.

팬들로부터 이른바 "사랑의 선물"도 밀려들기 시작했다. 그 중에는 다이아몬드도 있었 고, 밍크 코트도 있었고, 심지어 자동차도 있었다.
부를 축적해 가는 이들 부부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이도 없지 않았다.
패트 로버트슨 목사는 짐 베이커에게 "당신의 검은 캐딜락 승용차는 목사가 아니라 마피아 두목에게나 어울릴 것 같소"
라고 넌지시 조언하기도 한다.
베이커는 곧 승용차를 바꾸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돈에 대한 이들 부부의 욕심이 사라 진 것은 아니었다.
훗날 "당신의 설교와 실천 사이에는 너무 많은 차이가 나는 것 아니냐?" 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짐 베이커는 "내 설교와 실천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도 없다.
왜냐하 면 나는 언제나 번영과 축복의 복음만을 전해왔기 때문이다"라고 답변하곤 했다.

그와 함께 그는 성경 요한 3서 2절에 있는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라는 말씀을 자주 인용했다.
그는 또 외쳤다. "어떤 것도 하나 님께 충분히 좋은 것은 없다(하나님께 아무리 좋은 것을 바쳐도 충분치 않다).
하나님은 상 상할 수도 없는 부자시다. 하나님은 비행기를 타도 언제나 1등석만을 이용하실 것이다.
따라서 기름부음을 받은 나도 그렇게 한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께서는(적어도 짐 베이커 부 부의 주장에 의하면) 1972년 11월 8일 저녁, 짐 베이커에게 "오늘 CBN에서 퇴직하라"고 말 씀하신다.
CBN에서 퇴직한 짐 베이커 부부가, 망해가는 남캘리포니아의 지역 방송국을 인수하여 1973 년 설립한 것이 트리니티 방송국(Trinity Broadcasting System)이고,
이 방송의 새로운 쇼 프로그램 제목이 "주를 찬양하라(Praise the Lord, PTL)"였다.

새로운 방송국을 설립하면서도, 짐 베이커는 동역자들과 자주 충돌했다.
빚을 얻어서라도 100만 불 이상의 기자재를 마 구 주문하는 짐 베이커의 성장제일주의에 동의하지 않았던 다른 스탭들은 결국 짐 베이커를 쫓아내고 만다.
주도권을 다투는 추악한 싸움이 오간 뒤의 일이었다.

짐 베이커는 여기에 굴 하지 않고, 북 캐롤라이나로 옮겨 새로운 방송국을 설립하는데,
이번에는 아예 자신이 진행 하는 프로그램 제목의 약자 PTL을 방송국 이름으로 정해 버렸다.
이것이 본격적인 PTL 사 역의 출발이었고, 이후 PTL은 번성의 길을 걷는다.

미국 전역에 500여 개에 달하는 방송 국을 가지게 되었고, 인공위성을 이용한 방송도 시작했다.
1976년에는 기독교인을 위한 위락 시설의 필요를 강조하면서 디즈니랜드를 본 따 호텔과 놀이시설이 포함된 "헤리티지 USA" 라는 대규모 위락단지를 조성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기독교인을 위한 양로원과 대학이 필요 하다면서, 이를 위한 1억불의 헌금을 시작하기도 했다.

몇 번의 도전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 때마다 짐 베이커가 강조한 것은 자신이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사실이었다.
PTL의 사역이 최초로 균열조짐을 보인 것은 1977년의 일이었다.
그 해 6월 13일, 짐 베이 커는 자신의 토크쇼에 한국의 조용기 목사를 초청한다.
이곳에서 짐 베이커는 조용기 목사 에게 PTL의 아시아 책임자가 되어 줄 것을 돌발적으로 요청하고,
깜짝 놀란 조용기 목사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아멘"이라고 응답한다.

베이커의 선언은 계속되었다. "만약 조용기 목사가 우리로 하여금 방송시간을 갖도록 도와준다면, 우리는 방송을 시작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방송시간을 얻기 위해 헌금을 시작할 것입니다." 이와 함께 짐 베이커는 정말로 아시아 선교를 위한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틈만 나면 짐 베이커는 아시아를 위한 100만 불 의 헌금을 외쳤다.
그 해 가을 짐 베이커 목사는 한국의 PTL 방송을 위해 27만 7천불을 모 금했고, 마침내 10월에는 "지금 우리는 카메라를 보내기 위한 준비를 마쳤습니다.
우리는 한 국으로 보낼 특별한 카메라 패킷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라고 선언했다.
그 카메라 패킷은 한국에서 특별 방송팀을 만들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당연히 특별한 것이어야 했다.
그는 유 난히 "특별"을 강조했고, 그가 "특별"을 강조할 때마다 필요한 헌금의 액수는 계속 올라갔다.

이 때부터 한국을 방문하는 미국 기독교인들이, 짐 베이커가 말한 멋진 스튜디오를 구경 하기 위해, 조용기 목사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국 어디에도 짐 베이커가 말한 스튜디오는 없었다. 특별 카메라도 없었다. 조용기 목사도 당혹감을 느꼈다.
존재하지 않는 스튜디 오를 어떻게 보여준다는 말인가? 문제는바로 여기에 있었다.
짐 베이커는 "특별" 카메라 패킷을 구입한 일이 없었고, 돈을 한국으로 보내지도 않았던 것이다.

조용기 목사는 결국 방송을 위한 기자재를 스스로 구입했고, 짐 베이커와의 관계도 조용히 정리되었다.
똑같은 상황이 남미에서도 벌어졌다.
한국에서의 방송국 설립문제에 의문을 가진 최초의 정부기관은 연방방송위원회(Federal Communications Commission, FCC)였다.

FCC의 조사관 래리 번스타인 변호사는 PTL의 헌금이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를 파악하기 위해, PTL이 방송한 모든 프로그램의 테이프를 검토했고,
헌금과 실제 사용액 사이에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적발해 내게 된다.
국세청(IRS)도 조사에 나섰고, 뒤이어 짐 베이커가 증언대에 서게 되었다. 그러나, 짐 베이커는 최악의 증인이었다.
워낙 거짓말을 많이 하다보니 자기 진술이 자체적으로 모순을 보이는 경우만 해도 81회에 이르렀고,
기록과 모순된 진술이 19 차례, 다른 증인들과 모순되는 진술이 27회 에 이르렀다.

위증혐의가 확인되는 것만 해도 100여 회에 달했다(최근의 클린턴 사건에서 볼 수 있듯이 미국에서 위증은 심각한 범죄다).
드디어 짐 베이커가 걸려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짐 베이커는 굴하지 않았다. 6시간의 증언을 마친 짐 베이커는 당장 방송에 나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저는 오늘 주로 한국에서의 복음 사역에 대해 조사받았습니다. 그리스 도를 위한 아시아에서의 사역에 대해 거듭된 질문을 받았습니다.
 나를 함정에 빠뜨리려는 질문들이었습니다. 나는 오늘 내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 일을 하고야 말았습니다.
나는 오늘 내 형제를 배신했습니다. 왜냐하면 판사가 나에게 그걸 강요했기 때문입니다."

방송을 통한 그의 반격은 교활한 것이었다. 그는 종교의 자유를 거론했다. 감동적인 음악을 배경으 로 짐 베이커가 "PTL은 부당한 박해를 받고 있습니다.
FCC는 악마와 연합했습니다"라고 주장하는 동안, 테이미는 옆에서 눈물을 삼키고 있었다.

짐 베이커가 한마디씩 끊어 가면서 "우리가 원하는 것은 모든 미국인들이 원하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하나님을 예배할 권리입니다.
우리는 우리 뿐 아니라 어떤 교회도 정부에 의해 파괴되거나 협박당하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라고 결론을 내린 뒤,
방송 카메라는 찬송가 선율과 함께 교회 십자가 탑을 보여주었다. 바로 여기에서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FCC가 더 이상의 조사를 중단하기로 한 것이 다. 기적(?)이 아닐 수 없었다.

1980년 레이건이 집권하면서, 공화당 행정부는 보수적인 노선을 취하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보수적 기독교 세력과의 연합을 원했다.
종교계의 지원을 필요로 하게 된 것이다. FCC의 지도부도 경질되었고, 새로운 지도부는 레이건의 노선에 따라 종교계와의 충돌을 피하고자 했다.

번스타인 조사관은 이에 반발했지만, 일개 변호사가 짐 베이커의 거대한 방송제국을 무너뜨릴 수는 없었다.
결국 직장을 떠난 것은 짐 베이커가 아니라, 번스타인 변호사였다. 짐 베이커는 기고 만장해져서 선언했다. "하나님께서 승리하셨 다."
이때부터는 짐 베이커의 세상이었다. 더 이상 두려울 것이 없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확신은 그를 계속 밀어붙였다. 하나님을 위해서라면 무엇을 해도 좋다! 그리고, 그의 사역은 날로 확장되어갔다.
1985년에 이미 짐 베이커가 건축 중인 헤리티지 USA는 2,500명을 고용하고 있었고, 완성될 경우 미국 동부지역 최대의 호텔이 될 것이었다.

빅토리아풍의 호텔 로비에는 멋지게 장식된 피아노와 수영장이 있었고, 6개의 투명 엘리베이터가 운행되 었다.
호텔내의 대규모 서점에는 짐 베이커 목사 부부의 저서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모든 기자재와 물품들은 최고급만을 사용했는데, 이는 "하나님께서는 싸구려를 좋아하지 않는다" 라는 짐 베이커 부부의 지론에 따른 것이었다.
헤리티지 USA는 짐 베이커 목사의 성공을 상징했다.

FCC의 추적이 실패로 끝난 뒤, 짐 베이커의 사유재산 축적도 노골적이 되어갔다.
1981년 그는 사우스 캐롤라이나에 130만 불 상당의 집을 구입했고, 37만 5천불의 콘도미니엄과 20만 불 상당의 가구를 구입했다.
테네시에도 15만불 상당의 집을 구입했고, 캘리포니아 팜 스프링에도 60만 불 상당의 집을 구입했다.

PTL 본부의 사무실도 초호화 집기들로 치장되었다. 호화유람선도 샀고, 롤스로이스와 두 대의 벤츠(대당 6만 불이 넘는다),
마츠다 스포츠 카를 비롯한 각종 승용차도 구입했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이 모든 돈은 PTL이 지불했다.
짐 베이커 부부에게 월급을 쓸 일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신용카드로 마구 긁고 다니면 처리는 모두 PTL이 했다.
그리고, 누구도 짐 베이커 부부의 정확한 재산규모를 알지 못했다.

사람들은 그저 짐 베이커 부부가 "좀 잘 살고 있겠지"하는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1987년 봄, 마침내 짐 베이커 부부의 종말이 찾아왔다.
모든 스캔들이 다 그러하듯이 출발은 섹스 스캔들이었고, 일단 불어닥친 바람은 폭풍과도 같았다.

3월 17일, 짐 베이커는 제리 파월 목사와 격론을 벌인 뒤, 자신의 선교단체를 제리 파월 목사에게 인계하기로 결심한다.
2일 후, 짐 베이커는 이 결심을 공식화한다.
그가 이와 같은 결심을 하게 된 데는 제리 파월이 쥐고 있던 짐 베이커의 섹스 스캔들에 대한 정보가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 섹스 스캔들의 내용은 1980년 12월 6일, 뉴욕으로부터 짐 베이커를 보기 위해 찾아온 21세의 미모 의 여성 제시카 한을
짐 베이커를 비롯한 3명의 목사들이 강간했다는 것이었다.

짐 베이커는 자신이 아내와 문제가 있으며, 자신이 임포텐스인지를 확인해 보고 싶다면서 그녀를 강간했던 것이다
(짐 베이커는 자신이 강간당했다고 주장했다).

이 사건 이후, 제시카 한은 PTL로부터 방송 관계 일을 제안받았고,
나중에는 제시카 한은 짐 베이커로부터 26만 5천불의 거금을 지급받는다.
이 돈 역시 짐 베이커의 개인통장이 아닌 PTL의 돈으로 지출되었다.

이후에도 제시카 한은 계속하여 돈을 요구했으나, 짐 베이커가 제대로 응해 주지 않자, 이를 일부 언론에 폭로하기 시작하기 시작했고,
이것이 제리 파월에게도 알려졌던 것이었다.

그러나, 자기 자리를 제리 파월에게 넘겨주면서도, 짐 베이커는 끝까지 정신을 차리지 않았 다.
3월 23일, 짐 베이커는 누군가가 자신의 PTL 방송과 헤리티지 USA를 삼키려고 노리고 있다고 주장한다.
뒤이어 4월에 접어들면서 언론의 폭로전쟁이 시작되었다.

4월 18일, 제시 카 한 사건 이후 지속적으로 짐 베이커를 추적해 오던 "샤로트 옵저버"지는
1984년 이래 짐 베이커 부부가 월급과 보너스 명목으로 받아간 돈이 무려 480만 불(약 67억)에 달한다고 폭로한다.

하루 뒤, 짐 베이커는 제리 파월에게 "만약 내 자리를 돌려주지 않으면 거룩한 전쟁이 시작될 것"이라는 내용의 전문을 보낸다.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했던 것이다.

4월 25일 에는, 재정적인 어려움으로 뒤늦게 문을 연 2천 6백만불 상당의 헤리티지 호텔의 기금 4천 9백만불 상당이 이미 모금되었으나,
그 돈이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이 폭로되었다.

타임지는 PTL의 매월 재정적자가 300만 불에 달한다고 보도했다.
결국, 짐 베이커 부부 는 PTL의 재정적자가 매월 300만 불에 달하는 상태에서 그처럼 엄청난 돈을 개인 용도로 사용하고 있었던 셈이다.

7월 5일에는 헤리티지 호텔을 위해 모금된 7천만불의 돈 중 실제 건축에 사용된 돈은 1천 2백만불에 불과했다는 폭로도 터져 나온다.
짐 베이커 부부가 완전히 끝장난 것은 1987년 5월 27일의 "나이트라인" 인터뷰에서였다.
그 때까지 침묵을 지키던 짐 베이커 부부는 이 세계적인 시사프로에 출연하여 마지막 반격을 시도한다.

"왜 이제 입을 열려고 합니까?"라는 테드 카플의 질문에
짐 베이커는 "우리가 침묵을 지키는 수주동안, 우리는 너무나 많은 타격을 입어왔습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저에게 주신 성경구절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 시련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시편 38편 12절 이하입니다.
내 생명을 찾는 자가 올무를 놓고 나를 해하려는 자가 괴악한 일을 말하며 종일토록 궤계를 도모하나....성경은 주를 기다리는 자는
주께서 그의 힘을 새롭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한다.

자꾸만 성경말씀을 이용하여 자신의 상황 을 변명하려는 짐 베이커의 시도에 대해,
테드 카플은 "성경으로 당신을 포장하지 않고 답변해 줄 수 있겠느냐?" 고 요구한다.

그러나, 짐 베이커는 계속하여 간음한 여인의 이야기를 통해 죄 없는 자 먼저 돌로 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한다.
짙은 화장을 한 테이미 베이커는 그 옆에서 미소를 지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만약, 당신의 주장이 진실이라면 왜 제리 파월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하지 않느냐?" 는 질문에는
"악을 악으로 대응해서는 안된다"는 성경말 씀으로 답변을 대신했다.

"작년에 얼마나 많은 돈을 벌었느냐?"는 질문에는 오직 "모른다"로 일관한다.
"사람들이 당신을 "쇼핑 기계(너무나 쇼핑을 많이 한다는 의미)"라고 부르는 것을 알고 있느냐?"는 테드 카플의 질문에 대해
테이미 베이커는 "자신이 쇼핑을 즐기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정신과 의사의 치료보다 오히려 도움이 된다"고 변명한다.
에어컨까지 설치되어 있는 그들의 개집 문제에 대해서도 그들은 개에 대한 자신들의 애정을 이야기하며 피해간다.

미국인들은 끝까지 위선적인 짐 베이커 부부의 태도에 경악했다.
더 많은 폭로가 이어진 후 10월 27일에 이루어진 두 번째 인터뷰에서도 짐 베이커는 굽히지 않는다.
스스로를 목사로 칭하는 짐 베이커에게, 테드 카플이 "당신은 전직 목사지, 목사가 아니다"라고 직격탄을 날리자,
짐 베이커는 기가 막힌 듯이 웃으며 "하나님의 소명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지 사람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고 응답한다.

제시카 한 문제에 대해서도 그는 제시카 한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으로 간단히 답변한다.
나중에는 테드 카플이 선입견을 가지고 질문에 나서고 있다고 화를 내기도 한다. 위선이 극에 달한 장면이었다.

얼마 후, 짐 베이커가 자신이 고용한 데이비드 테거트와 동성연애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는 폭로도 나왔고,
동일한 시기에 테이미 베이커가 수 명의 다른 남자들과 관계하고 있었다는 폭로도 나왔다.
처참한 몰락이었다.

결국, 1989년 10월 24일, 짐 베이커는 공금 1억 5천 8백만불을 가로챈 혐의로 징역 45년과 벌금형을 선고받고 감옥으로 간다.
나중에 자신의 유죄를 인정함으로써 형은 8년으로 감형 되었고, 1994년 짐 베이커는 가석방되었다.

그동안, 이미 테이미 베이커는 짐 베이커의 곁을 떠나 짐의 친구였던 메스너와 재혼한 상태였다.
테이미는 코미디언 짐 불록과 함께 방송에 출연하여 재기를 시도하기도 하지만,
"마스카라 공장"으로서의 명성만을 확인한 채 실패로 끝났다.

짐 베이커는 뒤늦게 "내가 잘못했다(I was wrong)"이라는 책을 써내기도 하고,
TV 에 출연해서 눈물을 흘리기도 했지만, 누구도 이제는 그의 눈물을 믿지 않았다.

그는 미국에 서 가장 낮은 평가를 받는 인물이 되었고, 그의 사건은 미국 기독교계에 치유될 수 없는 상 처를 남겼다.
이미 10여 년 전부터, 한국 교회 지도자들에게는 여자와 돈, 그리고 거짓말하는 죄를 회개하지 않을 경우,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리라는 경고가 거듭되어 왔다.

[출처: 기독교시사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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