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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Feb

신약성서 이해

작성자: blue 조회 수: 1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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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서 이해

1. 신약성서의 형성배경

신약성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약성서뿐만 아니라 구약성서가 완성된 이후 신약성서가 기록되기까지
약 사 백년의 역사와 신약성서가 다루고 있는 시대와 장소의 역사적 상황을 알아야 한다.
이것을 우리는 신약성서의 배경이라는 이름으로 공부할 것이다.

기원전 587년 이스라엘이 멸망하면서 모든 귀족들이 바벨론으로 잡혀갔다.
이곳에서 유대인들은 집단 거주지를 형성하고 살았다.
이국 땅에서 나그네로 살아가면서 그들은 좌절하거나 동화되지 않고,
구약성서와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 기초한 미래의 희망을 발전시켰다.
그것은 그들의 역사를 반성, 참회하고 하나님에게로 돌아와 모세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율법을 수집, 교육, 준수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대하는 것이었다. 이 움직임을 '메시야 대망 사상'이라고 부른다.
'메시야'란 히브리어로 '하나님께 기름부음을 받은 이' 민족을 구원해줄 임무를 띤 사람이라는 뜻이다.

기원전 539년 바벨론제국이 무너지고 페르시아 제국이 수립되었을 때
잡혀간 유대인 중 일부가 여러 차례에 걸쳐 고국으로 귀환할 수 있었다.
그들은 파괴된 예루살렘 성전과 성벽을 수리하고 다시 쌓으며 대제사장을 중심으로 이스라엘 사회를 재건했다.
그러나 정치적인 독립을 얻지는 못했다.
그들은 비교적 자유롭게 독자적인 종교생활과 사회생활을 영위할 수는 있었지만,
적지 않은 세금을 지배자들에게 바쳐야 했고, 군사적으로 무장할 수는 없었다.
메시야 대망 사상은 점점 큰 꿈으로 부풀어갔다.

기원전 332년 그리스 출신의 알렉산더 대왕이 지중해 전역을 정복하고 대 헬라 제국을 세움으로써
유대인들은 헬라 문화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그들이 사용하던 아람어 이외에 헬라어가 공용어로 사용되었으며(이 상황은 예수 시대까지 계속된다),
헬라 풍의 도시 문화와 오락, 군사 문화가 팔레스틴에도 파급되었다.

기원전 175년 셀류커스 왕조의 안티오커스 4세가 지배자로 등장하면서 이스라엘의 역사에 한 중요한 사건이 발생했다.
안티오커스 대왕은 이스라엘 지역을 전략적인 요충지로 생각하고 이 지역을 강력하게 장악하기 위하여
유대인들에게 종교적인 탄압을 가했다.
이에 대한 반발로 기원전 167년 맛다디아라 불리우는 한 시골 제사장이 중심이 된 반란이 일어났다.
유대인들은 기원전 164년 가시적인 군사적 승리를 얻음으로써 마침내 정치적인 독립의 길을 조금씩 덜 수 있었다.
기원전 142년 유대인들은 세금 면제의 혜택을 받았고, 기원전 104년 드디어 왕이란 칭호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하스몬 혹은 마카비 왕가가 탄생한 것이다.

마카비 가문이 쟁취한 이 정치적 독립과 무장은 메시야 대망 사상에 두 가지 중요한 흐름을 낳았다.
이 사건을 그들의 꿈과 희망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반면에, 전혀 그렇게 보지 않았던 사람들도 있었다. 구약성서를 바탕으로한 메시야 대망 사상은
몇 가지 조건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조건이 현실에서 충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중 하나가 다윗 왕의 후예가 아니라 마카비 가문 출신이 왕이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분리 현상은 오래 가지 않았다.
로마 제국의 지배가 시작되면서 그들의 현실을 메시야를 기다리던 꿈이
실현된 것으로 받아들이기란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메시야 대망 사상은 더 절박한 민족적 희망으로 계속 자랄 수밖에 없었다.

기원전 64년 이스라엘은 로마 제국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당시 이스라엘 사회는 왕위 승계 문제로 첨예한 대립 상태에 있었다.
그들은 지중해의 새로운 지배자로 등장하고 있었던 로마 제국의 장군 폼페이우스에게 중재를 요청했고,
로마 군이 예루살렘에 무혈 입성함으로써 유대인에 대한 로마의 지배가 시작되었다.
로마 제국은 유대인들에게 대제사장 이상의 지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반면에 유대인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하는 수단으로 유대인이 아닌 민족 출신인 헤롯 가문을
'유대인의 왕'으로 등장시켰다.
이 후 종교적으로는 유대인 대제사장이, 정치적으로는 헤롯 가문이,
군사적으로는 그리고 실질적으로는 로마 제국이 팔레스틴을 지배하는 체제가 시작된 것이다.

율리우스 시저가 살해당한 후(기원전 44년) 로마의 쌍두 통치 체제를 형성한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는
기원전 43년 헤롯 대왕을 '유대인의 왕'으로 임명했다.
헤롯 대왕은 한 때 쫓겨나기도 했지만 이 두 친구들과 로마 군대의 도움으로 기원전 37년부터는
흔들림 없이 유대인을 통치하게 되었다.
그는 한 편으로는 유대인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메시야 (= 헬라어로 '그리스도')의 출현에 불안해 했고
늘 경각심을 가지고 있었다.
유대인들의 존경심을 살 만한 인물은 가차없이 살해하는 한 편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그들이 존경하던 마카비 가문의 한 공주와 정략적으로 결혼했다.
그가 거금을 들여 예루살렘의 성전을 수리, 증축한 것도 이런 종류의 업적이었다.

기원전 4년 헤롯 대왕이 병으로 죽자 그가 다스리던 팔레스틴은 크게 셋으로 분할되었고
로마 원로원에 의해 헤롯 대왕의 세 아들에게 상속되었다.
팔레스틴의 노른자에 속하는 유대 지역과 사마리아 지역은 아켈라오스라는 아들이 상속받았다.
그는 서기 6년경 폐위되었다.
이 때부터 이 지역에는 로마 황제가 직접 총독을 파송하는 황제 소유령 총독 정치가 시작되었고
치안을 위해 황제의 근위대가 파견되었다.

서기 26년에 폰티우스 필라투스(본디오 빌라도)가 총독으로 부임했다.
그는 로마의 군대를 앞세운 완고한 군인 정치가로 알려져 있다.
유대인들의 특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로마의 법과 권위를 세우려고 했다.
필요할 때는 언제나 폭력을 행사하고 군대를 동원했다.
필라투스를 임명한 사람은 당시 황실의 근위대장이었던 세자누스였는데
그는 로마 황제였던 티베리우스의 강력한 정적이기도 했다.
서기 31년 세자누스가 반역모의로 처형당한 후부터 티베리우스 황제는
세자누스와 관련있는 인물들을 모두 경계하고 있었다.
필라투스 총독의 임기 후반기는 이렇게 지지기반을 잃은 지극히 불안한 상태에 있었다.

유대인들은 율리우스 시저의 지중해 통일 이후 다른 민족들보다는 비교적 많은 특권을 누리고 있었다.
그것은 통일을 결정지은 알렉산드리아의 전투에서 유대인들이 율리우스 시저를 도와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독립국가를 형성하지 못할 뿐 아니라
계속되는 강대국의 지배에 굴복해야만 하는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했고, 이방인들에 대해 늘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로마 제국의 지배가 시작되면서 한 편으로는 현실적 절망감이, 다른 한 편으로는 메시야에 대한 기다림이 점점 커가고 있었다.

이러한 민족 감정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때로는 무기를 들고 강대국에 대항하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서기 65년 유대인들 중 과격한 일부 열심당원들이 로마에 대항하여 무기를 들고 잠시의 승리를 자축하기도 하지만,
서기 70년 티투스가 이끄는 로마 대군에 의하여 예루살렘은 함락되었고 예루살렘 성과 성전은 산산이 파괴되었다.
사방으로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은 서기 135년경 다시 한 번 거국적으로 모여 군사 행동을 일으키기는 하지만
이 역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이후 세계 제이차 대전이 끝나고 현대 이스라엘이 탄생하기까지 유대인들은 팔레스틴 지역
특히 예루살렘 부근에 발을 들여놓지 못했다.

고대 역사의 와중에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는 사라져 갔지만
유일신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신앙은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기독교는 유대교의 신앙을 계승한 것으로 한 민족의 울타리를 뛰어넘어 범세계적 종교로 인식되었다.
예수의 생애와 활동이 그 전환기 역할을 했다.
서기 70년의 유대 민족의 몰락은 유대 사회의 마지막을 의미하지만,
기독교 입장에서 보면 세계 종교로 도약하는 획기적인 전기였다.
기독교의 세계적인 색채는 사실 구약성서에도 폭넓게 표현되어 있다.
다만 유대 사회가 한 민족 사회로 자리잡고 있는 동안 그들의 고유 신앙인 것처럼 인식되었을 뿐이다.

2. 예수의 생애와 그 결과

예수의 생애와 그 가르침은 신약성서에 수록되어 있는 복음서들을 통해 전수되었다.
로마와 유대 역사서에 예수에 관한 간략한 정보들이 발견되기는 하지만 이것은 역사적 흔적 이상의 역할을 하지는 못한다.
이 역사 자료들과 복음서를 비교함으로써 우리는 예수의 생애를 비교적 생생하게 재구성할 수 있고,
신약성서를 통해 예수의 가르침이 무엇이며 그 결과가 어떠했는지를 배울 수 있다.

예수는 기원전 4년 4월 이전의 어느 날 예루살렘 부근에 있는 한 작은 마을 베들레헴에서 탄생했다.
이 때 로마 제국은 쌍두 통치 체제가 마감되고,
안토니우스를 물리친 옥타비아누스가 로마의 초대 황제로 등극하여 일인 통치 시대를 시작한 직후였다.
팔레스틴은 헤롯 대왕이 다스렸다.
요셉과 마리아는 약혼한 사람들로서 (당시 유대인의 약혼은 결혼과 같은 법적인 효력을 지니고 있었다) 나사렛에 살고 있었다.
그들은 전국에 내려진 황제의 호구 조사 명령에 따라 고향인 베들레헴으로 가야했다.
이 때 아내 마리아는 하나님의 이적적인 능력으로 임신을 한 만삭의 몸이었다.
고향에 도착한 그들은 여관에 빈방을 얻지 못하고 마굿간에서 밤을 지냈다.
이곳에서 마리아가 아들 예수를 낳았다.
예수가 처녀의 몸에서 하나님의 이적에 의해 탄생했으며, 그 장소가 베들레헴이었고,
당분간 아버지 노릇을 해야만 했던 요셉이 다윗 왕의 후예였다는 사실들은 예수가 구약성서에 예언된 메시야 즉
사람들을 구원하는 구세주요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려주는 증거로 제시된다.
예수의 어린 시절에 관한 얘기는 목동들과 동방에서 온 점성술사들의 방문,
아이 예수를 죽이려던 헤롯 대왕을 피해 이집트로 도망한 것,
그곳에서 어느 정도 지내다가 귀국한 요셉과 마리아가 나사렛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살았다는 것,
그리고 12살 때 있었던 성전 방문 사건뿐이다. 예수는 요셉을 따라 목수의 일을 하며 청년기를 맞았다.

예수는 서른 살쯤 되었을 때 목수로서의 삶을 마감하고 메시야로서의 사역을 시작했다.
이 때 로마 황제는 티베리우스였으며 유대/사마리아 지역은 총독 빌라투스가,
예수의 고향이 속해 있던 갈릴리 지방은 헤롯 대왕의 아들 헤롯 안티파스가 다스리고 있었다.
그는 당시 선지자로 사람들의 존경을 받던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다.
곧바로 광야로 나가 사십 일을 금식한 후 사탄의 세 가지 시험을 통과했다.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예수는 갈릴리 호수에 연해 있는 가버나움에서 활동을 시작하며
우선 베드로, 안드레, 요한, 야고보를 제자로 불렀다. 예수가 선택한 제자들은 잠시 후 12명으로 확정되었다.

예수는 병자들을 고치는 이적을 통하여 당장 유명해졌다.
그는 소경을 보게 하고, 앉은뱅이를 걷게 했으며, 문둥이를 고치는 등
그에게 직접 오거나 사람들이 데려 오는 병자들을 모두 고쳐 주었다.
바다에 이는 풍랑과 파도를 잠잠케 하여 죽음의 위기에 몰린 제자들을 살려주었다.
죽은 사람을 살려 주변의 사람들에게 더 없는 기쁨과 희망을 선사하기도 했다.
신약성서에 기록되어 있는 이적들 중에는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없다.
예수는 자신의 권위나 능력을 과시하거나 입증하기 위하여 기적을 사용하지는 않았다.
예수는 자신을 위해서 이적을 일으킨 적도 없었다.
신약성서에 기록되어 있는 이적은 모두 그가 사람들을 돕고 그들을 고통에서 해방시키는 그런 종류의 이적들이었다.
사람들은 이런 이적을 통하여 예수를 특별한 사람, 즉 구약성서에 예언된 바로 그 선지자 혹은 메시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사람들의 반응은 예수가 선포했던 "때가 되었다.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된다. 모두 회개하라"는 외침에 자극받은 것이었다.
적어도 예수의 제자들은 그들이 그렇게 기다리던 '메시야의 시대'가 시작된다고 믿었다. 이적은 그 증거였다.
예수의 소문은 순식간에 팔레스틴과 그 주변 지역으로 퍼져 나갔다. 사람들은 예수에게로 몰려들었다.

예수의 목적은 병자들을 고치는 것은 아니었다.
병을 고쳐줌으로써 인생의 무거운 짐들을 벗겨주고 삶에 새로운 희망을 심어주었으며,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그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신다는 것을 체험하게 한 것이 예수의 활동이었다.
꺼져가던 민족의 운명 속에서 사람들은 하나님을 향해 다시 눈을 뜨며 새로운 꿈에 빠져들었다.

예수에 따르면 - 이것은 구약성서의 내용이기도 하다 -
눈에 보이는 우주와 세상, 그리고 인생의 배후에는 이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계시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만드셨고 법칙과 질서를 주셨다. 세상은 사람들의 세상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세계였다.
인류는 하나님의 세상에 잠시 발을 붙이고 살다가는 나그네였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을 토대로 하여 살아가는 진화한 동물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창조주를 섬기며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대로 삶을 살아가야 하는 존재, 즉 하나님의 특별한 피조물이었다.
예수는 이적과 설교를 통하여 사람들이 먹는 것, 입는 것만을 위하여 살지 말고 하나님을 대면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도록 자극하고 요청했다.

예수는 이것을 "하나님의 나라"로 표현했다.
세상에는 하나님의 지혜와 계획이 새겨져 있을 뿐만 아니라 그 하나님이 인생과 세상, 온 우주를 다스리신다는 것이다.
그 하나님의 활동이 다시 시작되고 있다는 것이 그의 설교였다. 사람이 왕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 세상의 왕이시다.
그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시며 사람들을 자신에게로 부르신다. 구원하신다. 그리고 의와 평화의 나라로 인도하신다.
세상을 다스리는 하나님은 사람들의 좋은 것을 시기하고 앗아가며 공포에 떨게 하는 그런 심술꾸러기 신이 아니라,
인간을 만드시고 키우시며 보호하시고 돌보시는 사랑의 신이시다.
인간은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아버지"로 섬기며 하나님의 질서를 받아들이고 이해하며
그 신적 계획 속에서 살아가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다.

예수는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의 요구, 하나님의 사역을 사람들에게 알렸다.
예수는 자신의 생애를 통하여 하나님의 왕권이 이 세상에 분명하게 나타나는 것으로 설교했다.
예수는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이 자신을 통하여 이 세상에 구현되는 것으로 이해했다.
이러한 일을 하는 자신의 삶을 새 시대의 시작으로 규정했다. 악과 사탄의 세계는 이제 멸망의 길을 걷고 있다.
세상에 존재하는 악과 죄는 인류의 적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적이다.
이 새 시대에 사람들은 미움을 버리고 사랑을, 전쟁을 버리고 평화를, 폭력과 권위를 버리고 희생과 봉사를,
보복을 버리고 용서를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고 외쳤다.

사람들은 예수의 이적과 교훈에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호기심으로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이 있었다.
당시 유대 지도자들은 그들을 젖혀놓은 예수의 활동에 강한 반발감을 보였다.
유대인의 특권을 무시하는 것 같은 예수의 범세계적 사고를 놓고 열띤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예수의 교훈과 사역을 그대로 받아들인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은 예수의 제자가 되었다. 특별히 임명된 열 두 제자들 이외에 제자들의 수는 점점 불어났다.
예수의 초기 활동이 사람들에게 선풍을 불러일으킨 배후에는 사람들의 오해도 한 몫을 했다.
사람들은 과거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이집트에서 해방시켜 축복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했던 것처럼,
예수가 헤롯 가문과 로마 제국 등 하나님을 믿지 않는 지배자들을 몰아내고 유대 민족에게
꿈에도 그리던 해방과 자유를 선사하리라 기대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명을 굶주림에서 해결한 이적은 사람들에게 이런 희망을 부풀리기에 충분한 것으로 보였다.
오해의 와중에서도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에 대한 인식을 점점 달리했다.
처음에는 예수를 병을 고치는 의원이나 이적을 행하는 사람 정도로 혹은 그들을 가르치는 선생이나 스승 정도로 알고 있었으나,
그들은 곧 예수를 민족을 구원할 메시야로, 인류를 구원하러 온 하나님의 아들로 믿었다.
하나님께서 그를 보내셨고 그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었을 뿐만 아니라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렇게 기독교는 유대교의 뿌리에서 그 모든 정신과 내용을 이어가는 과정에서 나왔으면서도 예수를 믿고 따른다는 점에서는
- 유대교가 별도로 존재하기 때문에 - 독특한 종교로 탄생한 것이다.

예수의 공개적 사역은 삼년 정도 계속되었다.
그 동안 활동의 중심지는 갈릴리 지방에서 유대지역과 예루살렘으로 옮겨졌다.
이와 함께 예수의 활동의 방향과 방법도 달라졌다.
예수는 사람들을 찾아가기보다는 사람들이 자기에게로 모이는 것을 기다렸고,
생판 모르는 사람들에게 설교하기보다는 자신을 믿고 따르는 제자들을 집중적으로 가르쳤다.
명백한 표현을 쓰기보다는 비유라는 형식으로 설교함으로써,
한 언어를 가지고 자신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 무엇인가를 알리고,
자신을 믿지 않고 그저 따르는 사람들이나 오해하는 사람들과 적대자들에게는
예수의 정체와 교훈이 무엇인지 더 알기 어렵도록 만들었다.

삼 년이 끝날 즈음 예수의 활동이 유대인의 핵심부, 즉 예루살렘과 그곳에 세워진 성전으로 옮아가면서
예수의 사역은 집단적인 반대와 체제로부터의 비판에 부딪쳤다.
대제사장을 중심으로 하는 유대 지도부는 예수가 그들이 가지고 있는 기준에 일치하지 않는 행동을 한다는 것 때문에
그가 메시야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안식일에 일을 하며 병자들을 고친다는 것이 유대 사회를 혼란에 빠트린다고 생각하여 예수를 반대했다.
유대 지도부가 예수를 반대한 배경에는 그들의 정치적인 복안도 깔려 있었다.
예수의 가르침은 그들이 수 백 년간 유지해온 전통을 부정하는 것으로 보였다.
하나님에 대하여 원색적인 신앙의 태도를 요구하는 것은
오래 동안 외부의 지배세력과 결탁해온 그들의 지도력과 지지기반을 흔들어 놓는 것으로 보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부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그들 위에 군림하는 지배자들의 현실적인 힘을 인정해 오지 않았던가!
그들은 현실적으로 그들의 손에 조금 쥐어져 있었던 권력의 약화나 이탈을 더 크게 염려하였다.

결국 유대인 지도부는 예수를 죽이기로 결정했다.
그를 죽이기 위해 이중의 잣대를 적용했다. 예수는 자신을 하나님과 동일시하는 신성모독죄를 지었다.
이것은 유대인들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는 그가 죽어야 하는 이유였다.
또 예수는 자신을 유대인의 왕 즉 메시야라고 선전했다.
이것은 로마 총독이 심각하게 취급할 수밖에 없는 예수가 죽어야 하는 이유였다.
예수가 자신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자처했다면 그것은 로마 황제와 총독에 대한 엄중한 도전이 되기 때문이다.
유대 지도부는 예수를 한 밤중에 체포했다. 예수의 제자 중 한 사람이었던 유다가 그가 있는 곳으로 군인들을 안내했다.
대제사장은 즉각 공회를 소집하여 사형을 언도했다. 그리고 예수를 총독 빌라도 앞에 세웠다.
유대인들의 특성을 감안한 로마 제국은 모든 종교적인 문제에 대한 판결과 대책은 대제사장을 중심으로 한 공회에 일임했지만
사형을 언도하거나 집행할 수 있는 권한은 허용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총독 빌라도는 예수를 재판할 수밖에 없었다.
유대 지도부는 예수를 로마 황제에 대한 반역죄로 고소했다.
그들은 백성들을 충동질하여 그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노도와 같이 소리지르게 했다.
예수에게서 해방과 자유와 이스라엘의 재건을 기대했던 군중은
용서와 사랑과 희생과 봉사를 외치는 그에게 등을 돌리고 그의 죽음을 원했다.
빌라도는 유대인의 왕이라는 단어가 황제에 대한 도전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군중의 압력에 굴복하고 말았다.
그에게는 군중의 힘을 이길 여력이 없었다.
사건으로 인해 티베리우스 황제에게 자신을 제거할 구실을 주게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이 요구한 십자가형이란
로마 제국이 국가에 대한 반역자나 주인에 대해 반기를 든 노예에게나 집행하는 사형 방식이었다.
정확하게 예수가 언제 십자가에 못 박혔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역사가들의 계산으로는 33년 봄이 가장 역사에 근접하는 시점이다. 서기 30년 봄으로 계산되기도 한다.
정확한 날자는 어떻든 예수는 죄 없는 죄인으로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의 머리 위에는 "유대인의 왕"이란 팻말이 박혀 있어 그의 죽음이 유대인들에게도,
당시 법을 중시하던 로마인들에게도 부적당한 것임을 말없이 항변했다. 예수는 자신의 죽음을 미리 알고 있었다.
체포되던 그날 저녁에 예수는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먹으며 자신의 죽음은 자신의 삶의 목적이요
이것이 구약성서가 예언한 그 메시야의 길임을 설명했다.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방법, 인류가 하나님과 화해하는 길, 그것은 죄인의 죄를 대신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비는 자신의 죽음뿐이었다.
예수는 자신의 죽음이 하나님을 향하여 적절한 이유가 있는 것으로 이해했다.

복음서의 마지막 부분은 예수의 부활 사건에 대한 보도로 채워져 있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바위에 굴 모양으로 파놓은 무덤에 안치된 지 사흘째 되는 날
- 이 날은 일요일이었다 - 군인들이 지키던 무덤은 비어 있었다.
시체에 향을 발라 죽은 자에 대한 마지막 사랑을 표현하려던 여인들이 시체대신 예수를 만났다.
두려움으로 숨어 있던 제자들에게 예수는 다시 나타났다.
그리고 자신의 활동과 교훈을 '복음'이란 이름으로 모든 사람들에 의해 알리라고 부탁했다.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예수의 제자가 되었다. 이렇게 예수를 믿는 사람들 기독교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기독교란 '메시야'란 히브리어 단어와 같은 의미의 헬라어 단어 '크리스토스'를 중국인들이 비슷하게 발음하기 위하여
'기독(基督)'으로 표기한 단어에 '교(敎)'자를 붙인 것이다.

3. 신약성서의 탄생

예수가 부활했다는 소식에 예수의 제자들은 다시 모였다.
부활한 예수는 40일을 제자들과 함께 지내며 많은 것을, 특히 자신의 죽음과 그 의미를 설명하고 하늘로 승천한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지 50일이 되어 - 이 날은 유대인의 명절인 오순절이었다 - 예수의 제자들은
예루살렘에서 성령을 받고 그들이 보고들은 예수의 활동과 교훈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렇게 제자들이 전하던 내용을 '복음' 즉 '기쁜 소식'이라고 부른다.
이 단어는 처음에는 "하나님께서 드디어 왕으로서의 활동을 이 세상에 전개한다"는 예수의 가르침을 지시하던 것이었다.
예수의 제자들은 그 하나님의 활동이 예수의 생애를 통하여 나타났다고 믿었기 때문에, 예수의 가르침만이 아니라
예수의 활동과 생애를 이 단어의 내용으로 포함시켰다.
처음에 모였던 제자들의 수는 120명쯤이었으나 갑자기 그 숫자가 증가하기 시작했다.
열 두 제자들 특히 최초로 예수의 제자가 되었던 베드로와 요한이 지도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그들은 부활, 승천한 예수가 성령을 통하여 여전히 그들을 직접 지도한다고 믿었다.
뿐만 아니라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세상을 다스리고 있다고 믿었다.

예루살렘 교회의 무시할 수 없는 숫자와 그 영향력 때문에 유대 지도부에 의해 공개적인 박해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스데반이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다.
서기 36년경 빌라도는 로마로 소환되고, 로마 원로원이 임명하는 총독 관할구인 시라아 지역을 다스리던 비텔리우스가
임시로 예루살렘을 포함하는 유대/사마리아 지역을 관할하게 되자,
자연히 로마의 간섭이 약해지고 유대인 고유의 종교 정치 체제가 살아났다.
예수의 경우와는 달리 그들은 공회의 결정에 의해 스데반을 유대 방식에 따라 돌로 칠 수 있었던 것이다.

박해로 인하여 기독교인들은 예루살렘 밖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러나 흩어진 기독교인들은 가는 곳에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웠다.
그 결과 예수의 생애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교회는 유대와 사마리아 지역 곳곳에 세워졌고
서기 50년경 지금의 그리스 지역으로, 서기 60년경에는 로마 제국의 핵심부인 로마 시와 이탈리아 반도로
기독교는 급속도로 퍼져 나갔다. 지중해 남쪽으로는 아프리카 북부의 도시들에 교회가 세워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기독교인들을 잔인하게 박해하는 일에 앞장섰던 사울이 - 후에 바울이란 이름으로 개명함 - 개종하고
복음 전도자가 됨으로써 이런 기독교의 초기 역사에 지워질 수 없는 공헌을 남겼다.
주로 이 바울을 통해서 기독교 신앙은 유대인들에게 뿐만 아니라 다른 민족들에게도 전파되었다.
기독교는 그 출발점에서부터 세계인의 종교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기독교인들은 적지 않은 박해를 받았다.
1세기 전반의 박해는 주로 기독교를 탄생시킨 유대인들로부터 가해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1세기 후반으로 접어 들어가면서 유대인의 박해는 줄어들고
그 대신 로마 황제를 신으로 모시기를 촉구했던 로마 제국으로부터 한층 더 강한 박해가 일어났다.
기독교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삶을 포기하는 것과 같았다.
어떤 이들은 삶에 애착심을 가지고 박해를 피하려는 사람들은 기독교 신앙을 부인하거나
함께 지내던 기독교인들을 배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신앙은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외부적으로는 기독교인으로 보이지 않게 하려는 위선적 혹은 이중적인 행동을 하기도 했다.
기독교의 적은 외부에만 있지 않았다.
교회 안에서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행동함으로써 기독교 자체를 흔들어 놓는 소위 이단들이 출현했다.
예수에 대한 오해나 자의적인 해석이 고개를 들었다.

처음 교회를 지도했던 기독교 지도자들은 예수를 직접 만났고
그의 활동을 보고 그의 가르침을 들었던 예수의 실제 제자로 제한되어 있었다.
이들은 목격자들 혹은 증인이란 이름으로 구별되었다.
서기 50년경 교회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상황에 도달하자
이들은 모든 교회에 제 때 필요한 충고를 직접 주거나 직접 지도력을 행사하기 어려웠다.
그들은 편지라는 형식으로 그들 대신 교회의 지도력의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렇게 탄생한 것이 신약성서에 포함되어 있는 수많은 편지들이었다. 이 편지들은 대개 고대의 서간문 형식으로 되어 있다.
우선 편지를 보낸 사람의 실명 혹은 직함이 언급되고 편지를 받는 개인, 교회, 또는 넓은 지역이 적혀 있고 간략한 인사말이 나온다.
수신자의 상황에 대한 칭찬 혹은 책망이 따르고 글을 쓴 사람의 의견이 제시되어 있다.
때로는 부탁과 충고가 나오고 간략한 인사와 축복으로 마친다.
송신자는 편지의 내용이 한결같이 그들의 사견이 아니라 그들이 믿는 예수의 지시임을 알린다.
그들은 교회의 지도자로서 이 편지들을 보내고 있음을 확실하게 했던 것이다.
이 때 편지를 받은 사람들은 지금 복음서에 기록된 것과 같은 내용을 전도자들을 통해 배웠고 알고 있었고 다 받아 들였던 사람들이다.

편지들보다는 조금 늦게 서기 60년경에 복음서들이 기록되었다.
복음서들이 비교적 늦게 등장한 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처음에 예수의 제자들은 그들이 예수에게서 듣고 본 것을 기록하기보다는 말로 전함으로써 복음을 전파하고 교회를 세웠다.
교회가 몇 안되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언제 어디서나 목격자들을 통해 예수의 활동과 교훈을 생생하게 배울 수 있었다.
초대 교회의 기독교인들은 그들이 믿는 예수가 어쩌면 그들이 살아 활동하는 동안 다시 오실 것이라고 믿었던 것 같다.
 따라서 책을 만들기보다는 전도자로 활동하는 것을 더 중요시했던 것으로 보인다.
책을 만든다는 것이 당시에는 비용이 많이 드는 작업이었다는 사실도 알아두어야 한다.
한 마디로 돌에 글자를 새기는 것이 더 쉬웠던 시대였다.

서기 60년경으로 접어들면서 이러한 상황에 변화가 왔다. 목격자들은 대부분 세상을 떠났다.
교회는 점점 증가해 갔다.
목격자들이 일일이 돌아다니며 교회의 예배시에 혹은 전도시에 예수에 관한 얘기를 반복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예수에 관한 얘기를 듣고 싶어하는 사람들과 교회들은 기회는 증가해 갔지만
목격자들의 설교만을 의존하는 것은 점점 드문 일이 되었다. 동시에 구전의 한계점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말은 아무리 정확하게 전달하더라도 전달의 과정이 반복됨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는 것을 막을 수 없다.
목격자들이 다 세상을 떠나기 전에 그들이 보고들은 것 즉 예수에 관한 지식의 원형을 정확하게 보전할 필요성이 부상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글이 전도와 교육, 예배에 획기적인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늘어나는 이단과 적대자들, 핍박자들을 대항할 효과적인 자료가 필요했다는 사실도
복음서가 드디어 기록되도록 재촉한 원인이었다.

이렇게 다른 저자들에 의해 다른 시대에 다른 장소에서 기록되어 각기 다른 수신자들에게 보내진 책들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여 한 권의 책으로 모이게 되었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대략적인 추정이 가능하다.

각 서신이 기록되어 교인들에게 보내졌을 때 그 교회는 한 권의 책을 가지게 되었다.
잠시 후 다른 곳의 교회에 다른 한 편지가 보내지고 이런 과정을 통하여
신약성서의 특정한 책을 가진 교회가 하나 둘 씩 늘어갔다.
교회 지도자들이 지명된 교회에 보낸 편지들은 예배시에 낭독되었다.
이 편지들은 교회 안팎의 적과 어려움을 해결해 주었다.
비슷한 문제가 다른 교회에 발생했을 때 그들은 그들이 간직하고 있던 편지를 이웃 교회에 베껴 주기도 하고,
이웃 교회에서 베껴가기도 하였다.
이런 필사과정을 통하여 한 편지 혹은 한 복음서의 많은 사본이 만들어지고 같은 책을 소유하는 교회가 늘어갔다.
동시에 한 교회가 하나 이상의 책들을 소유하게 되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 27권의 책들이 자연스럽게 만나게 되었고 하나의 문집으로 완성되었다.

신약성서에 포함된 마지막 책 요한계시록이 기록된 것은 서기 95년경으로 추산된다.
하지만 27권의 책이 모두 모아진 것은 훨씬 뒤의 일이다.
때로는, 지역에 따라서 현재 신약성서에 포함되지 않은 책들이 교회에서 사용되기도 했다.
이런 책들을 우리는 [신약 외경]이라고 부른다.
신약성서 27권 중에 포함되어 있는 책들 중에서 어떤 것은 지역에 따라 교회가 사용하기를 꺼려했던 책도 있었다.
이런 책은 2-3권에 지나지 않는다.
신약성서의 책들은 대부분 기록되었던 시기부터 기독교인들이 그들의 신앙과 삶을 위하여 사용하던 책들이었다.
늦어도 3-4세기 사이에 외경은 다 제외되었고, 27권만이 신약성서에 포함되었다.
사본이 만들어지고 사본을 통하여 신약성서 27권이 모이는 이 과정에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각 사본들이 큰 차이 없이 1500년 가까이 복사되어 내려왔다는 사실이다.

로마 제국은 그들이 지중해 연안을 통일시켰을 때 구태여 그들의 언어를 모든 민족이 사용할 것을 강요하지 않았다.
그들은 지중해 연안 어디에서나 사용되고 있었던 헬라어를 오히려 사랑했으며,
헬라어를 통하여 그리스의 문화를 배우고 계승하려고 했다.
이런 이유로 로마 제국의 전 영역에서는 헬라어가 오랫동안 공용어로 사용되었다.
초기 기독교 지도자들은 당시 사람들이 쉽게 배우고 어느 곳에서나 사용하던 헬라어를 사용하여
신약성서의 책들을 기록한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서기 5세기로 접어들면서 로마를 중심으로 한 서방 교회는 더 이상 헬라어를 사용하지 않고 라틴어를 사용했다.
따라서 헬라어 성경이 라틴어로 번역되었다.
서방 교회에서 사용하던 성경은 제롬이 번역한 것이었는데 16세기 종교개혁이 일어날 때까지
서방 교회는 이 라틴어 성경을 사용했고 자국어로의 번역을 금지시켰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플 즉 지금의 이스탄불을 중심으로 하는 동방 교회는
그들의 언어인 헬라어를 계속 사용하며 헬라어 신약성서를 필사해 갔다.

유럽에서 종교 개혁 혹은 교회 개혁이 시작되면서 개혁자들은 성경을 자국어로 번역했고
신약성서에 관한 한 원어인 헬라어 성경을 되찾으려 했다.
이것이 종교개혁의 유명한 모토가 된 "원어로 돌아가자"는 움직임이었다.
라틴어 번역 성경의 제한성을 의식하고 헬라어 신약성서로 되돌아가자는 것이었다.
개혁자들은 도서관을 뒤져 헬라어 신약성서를 하나 둘 찾아냈다.
당시까지 동방교회에서 사용되고 있었던 필사본 헬라어 신약성서들이 발견되었다.
종교개혁 시기에 발명된 인쇄술이 헬라어 신약성서와 자국어 번역 성경의 보급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신약성서가 한국어로 번역된 것은 19세기말 개신교가 한국에 들어오는 것과 때를 같이 한다.
1882년 3월 24일 상인으로 중국을 드나들던 한국인들이 중국에서 활동하고 있던 선교사들과 협력하여
최초로 누가복음을 번역한 것이 그 시작이었다.
곧 이어 요한복음이 번역되었다. 1883년 사도행전이, 1884년에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이 번역되었다.
이렇게 번역된 복음서들은 '쪽복음'이란 별명으로 중국에 연접한 북한 지역에 보급되었고,
이 복음서를 통하여 최초의 한국 기독교인들이 탄생하였다.
다른 한 편으로는 1884년 일본에서 이수정이 신약성경을 번역하였다.
1885년 한국에 온 최초의 기독교 선교사들은 이 성경을 소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 대부분의 한국 교회가 사용하는 성경은 1938년에 출판된 「신구약 개역 성경」으로서
1952년과 1956년에 철자법을 수정한 것이다.
1967년 최초로 한국 신학자들이 헬라어에서 번역한 「새번역」, 1972년 신구교 합동으로 번역한 「공동번역」 이외에
1977년의 「현대인의 성경」, 1983년의 「표준 신약전서」, 1992년 「표준 새번역」 등이
한국 교회에서 사용되고 있다.

4. 각 책의 주요 내용

신약성서는 사람들의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 죽은 예수의 생애와 교훈을 알려주며,
이것을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용서와 구원을 약속하는 것을 주제로 삼고 있다.
즉 예수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그 중심 주제이다. 이것을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교회라고 달리 표현할 수도 있다.

4-1. 복음서

신약성서에 포함되어 있는 복음서는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 이렇게 넷이다.
이 복음서들은 예수의 활동, 교훈을 포함하는 그의 생애를 소개하는 책들이다.
예수는 공적인 활동을 시작하면서 제자들을 선택했고 항상 함께 했기 때문에
복음서가 보여주는 예수의 생애는 제자들의 행보와 함께 엮어져 있다.
복음서에서 우리는 예수가 누구이며, 무엇을 가르쳤고, 무엇을 했으며, 왜 그렇게 했는가를 배울 수 있다.
또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며, 무엇을 해야 하는지,
혹은 예수가 그를 믿는 자들에게 약속하고 명령한 것이 무엇인지 등을 배울 수 있다.
네 복음서는 모두 예수의 세례, 사탄에게 받은 시험, 초기 갈릴리 활동과 후기 유대 사역, 예루살렘에서의 마지막 일주일,
예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부활을 공통적인 내용으로 가지고 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는 예수의 탄생 기사가 더 수록되어 있고, 누가복음에는 예수의 승천 기사가 첨가되어 있다.
요한복음은 예수의 탄생 이전의 정보를 제공한다. 예수의 생애는 하나였지만 저자가 이것을 누구에게 전하려 했고
그 목적이 무엇이었는가에 따라 강조점과 소개하는 내용 및 방법이 복음서마다 조금씩 다르다.
즉 각 복음서는 각자의 특색을 가지고 있다. 마태, 마가, 누가복음은 대체적으로 비슷한 내용과 비슷한 시각으로
예수의 생애를 조명했기 때문에 공관복음이라고 부른다.

마태복음은 열 두 사도들 중 하나인 마태가 유대인들에게 전한 복음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마태복음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약성서를 잘 알고 있어야 할뿐만 아니라
예수의 생애 당시 유대인의 관습과 문화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예수의 제자들의 단체성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고, 예수의 설교가 많이 수록되어 있다는 것이 마태복음의 특징이다.
예를 들어 5-7장에 수록된 산상설교는 기독교인이 아니라도 그 중 한 두 구절은 알고 있을 정도로 유명하다.

마가복음은 예수의 수제자로 알려진 베드로의 통역 마가가 로마 사람들을 위하여 기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주로 예수의 활동에 초점을 맞추었다.
아람어를 잘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록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람어 단어들이 다른 복음서보다 더 많이 나온다는 것,
그리고 예수와 그 제자들의 인간적인 면모를 더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다는 점 때문에,
가장 먼저 탄생한 복음서로 인정된다.

누가복음은 사도 바울의 동료로 전도여행을 따라 다니던 의사 누가가 데오빌로라는 로마의 한 고위 관리에게
그가 이미 들은 복음이 확실하다는 것을 알리기 위하여 기록했다.
누가복음에는 개인적인 사건들이 많이 수록되어 있다.
당시 사회의 소외 계층에 속하는 사람들이 많이 등장한다는 것 때문에 가난한 자들의 복음서라는 별명을 얻었다.

요한복음은 위의 세 복음서와는 판이한 문제와 내용들을 가지고 있는데,
열 두 제자들 중 베드로와 함께 초대 교회에서 지도력을 행사했던 요한이 기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예수의 신성을 강조하고 예수를 믿는 사람은 구원과 영생을 이미 얻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하여
이 복음서를 기록한다고 명문화해 놓았다.
세 복음서의 내용을 익히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요한복음을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4-2. 사도행전

이 책의 저자는 누가복음을 기록한 누가인데, 누가는 이 두 책을 연이어 저술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책을 만들던 자료로 두 책을 묶을 때에는 분량이 너무 두꺼워지는 것 때문에 두 권의 책으로 나눈 것 같다.
따라서 사도행전은 누가복음에 이어 읽을 때 그 내용을 이해하기가 더 쉽다.
사도행전에는 예수의 승천 기사를 시작으로 오순절의 성령 강림 사건, 예루살렘 교회의 탄생,
발전과 박해에 얽힌 사건들, 유대/사마리아 지역으로의 기독교가 퍼져 나가는 과정 등
기독교가 어떻게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당시 세계의 중심부로 알려져 있던 로마까지 전파되었는지 그 과정을 알려준다.

사도행전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기는 하지만 전반부는 주로 베드로 사도의 활동이,
후반부에는 주로 바울 사도의 활동이 수록되어 있다.
사도행전은 사실 기독교를 전파하는 사람보다는 기독교가 전파되는 지역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전반부는 예루살렘, 유대, 사마리아 지역(지금의 이스라엘)에,
후반부는 이 지역 북쪽의 소아시아 (지금의 터키)와 헬라,
마케도니아 지역(지금의 그리스)에서 일어난 일들이 소개되어 있다.

4-3. 바울서신

바울 사도의 전도 활동이 사도행전의 후반부에 비교적 자세하게 소개되어 있는데
그의 서신들은 대부분 이 기간에 기록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사도행전과 비교하며 이 서신들을 읽는 것이 도움이 된다.
그가 쓴 편지들은 로마서, 고린도전서와 후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전서와 후서,
디모데전서와 후서, 디도서, 빌레몬서인데, 앞의 아홉 편지들은 편지의 수신지명을,
뒤의 네 편지들은 편지의 수순자명을 그 책 제목으로 가지고 있다.
신약성서에는 기록된 연대순이 아니라 편지의 크기와 내용의 무게에 따라 배열되어 있다.

로마서는 바울 사도가 로마에 있는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로서 기독교 교리의 핵심을 설명하는 전반부와
기독교인의 삶을 지시하는 후반부로 구성되어 있다.
모든 사람은 죄인이라는 것, 예수의 하신 일이 복음이라는 것,
이 복음을 믿음으로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 된다는 것,
믿는 사람들을 하나님은 깨끗하게 살아가도록 해 주신다는 것 등이 그 주요 내용이다.

고린도전서와 후서는 그리스의 고린도에 세워진 교회에 보낸 편지로서
고린도 교회에 발생한 어려운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기록한 것이다.
교회의 분쟁, 음행, 결혼 문제, 우상의 제물, 예배시의 질서, 성령의 은사, 부활 등이
고린도전서의 주요 주제이고 후서는 그의 편지가 끼친 결과에 대한 감사와 해명 등이 수록되어 있다.

갈라디아서는 갈라디아라 불리우던 지역의 교회에 보낸 편지인데 바울의 사도권, 율법과 복음 문제,
성령 안에서의 삶 등이 주요 주제이다.

에베소서는 터어키 서해안에 위치한 에베소에 보낸 편지인데 교회가 무엇이며
교회가 어떤 모습으로 존재해야 하는지가 그 주요 주제이다.

빌립보서는 지금의 그리스 중부에 있는 조그만 도시 빌립보에 세워진 교회에 보낸 편지이다.
빌립보 교회가 바울의 전도 사역에 도움을 준 것에 감사하며, 기독교인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주로 다루고 있다.

골로새서는 골로새에 있는 교회에 보낸 편지인데 그 정확한 위치는 알려져 있지 않다.
내용은 에베소서와 비슷한데 에베소서가 교회에 초점을 맞춘 반면,
골로새서는 교회를 이끌고 다스리시는 그리스도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데살로니가전서와 후서는 지금의 그리스 중 두 번째 도시로 성장한
고대 데살로니가에 세워진 교회에 보낸 편지이다.
죽은 자의 부활과 예수의 재림이 그 중요 주제이다.

디모데전서와 후서, 디도서를 보통 목회서신이라고 부른다.
그 이유는 바울 사도가 제자인 디모데와 디도에게 자신의 일을 대신하도록 부탁하는 편지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 편지에서 디모데와 디도가 교회에서 어떤 일을 어떻게 해야 하고
교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중요한 일들이 무엇인지를 주로 다루었다.

빌레몬서는 그가 전도한 빌레몬에게 보낸 편지로서,
바울은 그가 옥중에서 만나 전도한 도망친 노예를 그 주인인 빌레몬에게 돌려 보내면서
그를 용서하고 형제처럼 대우할 것을 부탁하기 위하여 이 편지를 썼다.

4-4. 히브리서

히브리서의 저자는 명확하게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적지 않은 학자들이 바울 사도의 편지라고 말한다.
이 편지는 그리스도의 우월성을 논증하며 그를 하나님의 아들,
영원한 대제사장,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시는 분으로 소개한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사람들의 죄를 위하여 하나님께 바쳐진 속죄제물로 소개했다.

4-5 .야고보서

야고보서의 저자는 예수의 동생이었던 야고보로 알려져 있다.
그는 예수를 주님으로 믿는 자가 되어 초대 교회의 지도자로 활동했다.
이 편지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단지 지식이나,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예수의 교훈대로 살아가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기독교인이 당하는 시련, 물질에 대한 태도,
사람들을 겉모습만 보고 대하지 말 것, 말조심, 부에 대한 교훈 등을 포함하고 있다.

4-6.베드로 전서와 후서

이 두 편지는 베드로 사도가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당하는 고난의 문제를 다루며 고난 중에서도 희망을 잃지 말 것을 권한다.
교회를 어지럽히는 거짓 교훈 즉 이단에 대한 경고, 마지막을 의식하며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대하며 살도록 충고하는 것이 중요 내용이다.

4-7.요한 일서, 이서, 삼서

이 세 편지를 쓴 사람은 사도 요한으로 알려져 있으나 명확하지 않은 점도 있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무엇인지, 어떻게 죄를 피해야 하는지,
어떻게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결합되어 있는지 등을 다루고 있다.
교회를 위협하는 이단에 대한 경고와 대책도 그 중요 내용이다.

4-8. 유다서

유다서는 예수의 동생이었던 유다가 쓴 편지로 알려져 있다.
이 편지에 유다는 복음을 곡해하는 다른 교훈을 가르치는 거짓 교사들에 대하여 경고하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을 알리며 복음을 굳게 붙들 것을 부탁했다.

4-9. 요한계시록

요한 계시록은 신약성서의 다른 책 26권과는 아주 다른 형식의 책이다.
이 계시록의 저자는 말년에 에베소 교회에서 목회하다가 밧모라 불리우는 섬으로 유배된 요한 사도로 알려져 있다.
이 섬에서 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보여주시는 환상을 기록하여 지금의 터어키 지역에 있던 일곱 교회에 보냈다.
그가 본 환상은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으며, 편지를 쓸 당시의 상황이 어떤 것이며,
앞으로 어떤 일들이 일어날 것인지를 상징의 형태로 알려주는 것이었다.

계시록의 주제는 죽임을 당한 예수 그리스도가 영원한 왕으로서 지금도 그리고 미래에도 이 세상을 다스리시며
믿는 사람들과 교회에 궁극적인 승리를 주신다는 것이다.
즉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일들이 하나님의 눈에는 어떻게 해석되는가를 보여 줌으로써,
로마 황제에게 혹독한 박해를 당하고 있는 기독교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믿음을 버리지 않도록
권고하고 자극하기 위한 책이 요한계시록이다.

<참고문헌>

du Toit, A. B./ 권성수 역. 신약정경론(The Canon of the New Testament). 도서출판 엠마오, 1991.
Gundry, R. H./ 김일우 역. 신약개론. 서울: 도서출판 엠마오, 1993.
Guthrie, D. 신약서론(New Testament Introduction).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2.
Lohse, E./박창건 역. 신약성서 배경사(Umwelt des Neuen Testaments). 대한기독교출판사, 1984.
Metzger, B. M. 신약성서개설(The New Testament). 대한기독교출판사, 1990.

정훈택(총신대학교, 신약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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